2012년 고려강화역사문화센터 설치
2013년 하반기 시 산하기관으로 설립
유물유적 사진전·'개성부원록' 발간
강화해양관방유적 세계유산 추진 의의
2017년 인천문화재단에 통폐합
인천문화유산센터로 이름 변경
영문 KOREA(코리아)는 고려에서 왔다.
고려의 수도 개성을 드나들던 아라비아의 상인들이 해외에 그렇게 알리면서 국제적으로 통용되게 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이처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한국전쟁 이후 고려의 수도 개성이 북한 지역에 들어가면서 남한에서는 고려의 역사성을 내세울 만한 곳이 극히 드물어졌다. 여몽전쟁 시기 38년간이나 피란수도로 기능했던 강화도가 거의 유일하다. 이런 점에서 2013년 7월 강화고려역사재단이 인천광역시 산하 기관으로 설립된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인천이 강화 지역의 역사성을 내세워 남북의 연결 지점으로써의 역할을 자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화고려역사재단의 초대 대표이사는 고려사 연구에서 선도적 역할을 해 온 박종기 국민대 교수가 맡았다.
강화고려역사재단은 2012년 8월 21일 인천문화재단에 고려강화역사문화센터가 설치된 데에서 출발한다. 그 시작은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가 건넨 한마디였다고 한다.
인천문화재단 초대 대표이사를 맡았던 최원식 교수가 <인천문화재단 5주년 백서>(2010년 발간)에 기고한 글 '뒤돌아보는 소 _ 인천문화재단 출범 5주년을 축하하며'에서 그 단초를 읽을 수 있다. 2005년 8월에 인천 문화예술 대표 인물 조명 사업의 첫 번째 대상이던 우현 고유섭 선생 관련 전시회와 국제학술행사를 가졌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점심 자리에서 강화도에 고려문화재연구소를 구상하고 있다는 귀띔을 해 준 게 인천 차원의 고려 관련 기구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는 거다.
인천문화재단 내에 고려강화역사문화센터를 일정 기간만 임시로 두기로 방침을 정한 인천시에서는 센터가 다음과 같은 일을 해 주기를 희망했다.
인천시가 원한 고려강화역사문화센터 역할
① '고려강화역사문화재단'설립·운영을 위한 경험 축적 및 토대 마련
② 강화군 내 역사문화유산의 효율적 보존ㆍ활용을 위한 방안 모색
③ 강화군 내 역사문화유산의 시민 홍보 및 참여 사업 기획
④ 고려시대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한 남북교류 및 공동사업 모색
인천시가 고려강화역사문화센터의 첫 번째 역할로 요구한 업무가 '고려강화역사문화재단'의 설립을 위한 토대 마련이었다. 그 일은 의외로 순조롭게 풀렸다. 인천시의회에서까지 재단 설립을 서둘러줄 것을 인천시에 요청하고 나선 거였다. 그리하여 2013년 하반기 강화고려역사재단이 출범할 수 있었다. 명칭은 강화지역의 역사 속에서 고려사에 초점을 맞추어 사업을 추진한다는 의미에서 '강화고려역사재단'으로 정했다. 7월에 출범했지만 기념식은 9월에 가졌다. 기념식의 일환으로 고려 고종(재위 : 1213~1259)의 무덤인 홍릉(洪陵)에서 고유제(告由祭)도 지냈다. 인천의 공공 기관이 역대 왕의 무덤 앞에서 제를 지낸 경우가 언제 또 있었던가 싶다. 그만큼 강화고려역사재단의 설립이 뜻하는 바가 컸다.
그런데 재단 출발부터 정체성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강화고려역사재단에서 2014년 아시안게임을 위해 신축한 강화고인돌체육관과 강화아시아드BMX경기장의 운영을 맡기로 하면서다. 출범 당시 역사 연구직 직원이 1명이었던 반면 체육시설 운영을 담당할 직원이 4명이나 되는 등 인적 구성부터가 본말이 전도된 형국이었다. 그것은 강화의 아시안게임 경기장 운영 기관이 필요했던 인천시와 강화에 새로운 업무 공간을 마련해야 했던 재단 간의 고육지책이었다고는 하지만 역사 관련 기관이 체육 시설을 운영한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옳지 않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화고려역사재단은 활발한 사업을 펼쳐나갔다. 매년 몇 차례씩 계속하고 있는 강화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주제로 한 학술회의는 나름의 성과를 축적해 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각종 시민 대상 강좌도 인기를 끌었다. 2014년 '강화-개성 고려 유물유적 사진전 '두 개의 도시, 하나의 마음'' 전(展) 행사와 2015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 책의 수도 인천 행사'로 기획한 '한국과 인천의 기록문화전 - '기록, 그 위대한 여정''은 많은 호평을 이끌어 냈다.
'강화해양관방유적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추진' 사업은 강화고려역사재단의 대형 프로젝트였다. 이미 2000년도에 강화 지역 선사 유적인 고인돌이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던 터였다. 여기에 강화도를 빙 두르고 있는 돈대까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경우 강화는 물론이고 인천이 국제적인 관광문화도시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 사업이었다. 2014년 7월 출범한 인천시 민선 6기 시정부의 주요 정책으로 '강화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사업'이 포함되었다. 강화도의 돈대를 비롯한 관방 유적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조선시대, 전시에 임시 수도로 기능하기 위한 방어시설이면서 강화도 북쪽 일부 돈대의 경우 해안 방어를 담당하는 대한민국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는 진지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초병들이 지키던 돌로 쌓은 담장에서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 국군이 근무하고 있는 진기한 현장이다. 물론 이곳은 일반인 접근이 통제되고 있다. 지나간 역사와 지금의 현실이 국토방위라고 하는 하나의 개념 속에서 공존하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공간이다. 그러나 강화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사업은 주민들의 반대에 부닥쳐 중단된 상태다. 분단 이후 문화재 보호법과 군사시설 보호법 사이에서 2중의 제약을 받아 온 주민들이 세계문화유산이 될 경우 자칫 3중의 제약을 받을 것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컸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인천시 정부와 국가가 나서서 대안을 마련한다면 충분히 주민들을 이해시키고, 다시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이다. 아무튼 이 사업 추진 과정에서 강화고려역사재단이 한국국토정보공사(LX) 인천지역본부와 공동으로 마련한 강화도의 돈대와 강화외성, 해안 포대 등의 정밀실측조사 결과물은 대단히 유의미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강화고려역사재단의 학술총서 사업의 첫 번째로 진행한 <개성부원록(開城赴援錄)> 발간 역시 의미가 컸다. <개성부원록>은 1866년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했을 때 개성의 백성들이 군대를 결성해 강화도를 도와주기 위해 나선 것을 기록한 책이다. 당시 서양인과의 접촉 과정에서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여러 가지 내용과 강화, 개성, 각 포구 등에서 오고 가는 문서 수발 과정, 특히 대원군에게 하던 보고 과정, 당시 군대와 지방의 생생한 현장 묘사 등 이 책을 통해서만 살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개성부원록>은 병인양요를 새롭게 이해하고, 당시 시대상을 다른 차원에서 연구할 수 있는 독보적인 자료이다. 강화고려역사재단이 아니었다면 어느 기관이 얼핏 '개성'이란 지역에 국한한 기록으로 보이는 이 책의 번역 작업에 선뜻 나설 수 있었을 것인가. <개성부원록>의 한글 번역은 강화고려역사재단이 이룩한 뚜렷한 성과임에 틀림이 없다.
강화고려역사재단은 중앙정부의 공공기관 통폐합 정책과 여기에 호응한 인천시 정부의 방침에 따라 다시 인천문화재단으로 통폐합되었다. 통합은 2017년 3월 1일 자였다. 인천문화재단 강화역사문화센터로 새롭게 출발해야 했다. 강화고려역사재단 출범 3년 8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인천문화재단으로 통합된 뒤 결국은 '강화'와 '고려'를 떼어 내고 '인천문화유산센터'로 이름을 고쳤다. 강화고려역사재단을 청산한 조치는 경제 논리에서 역사는 늘 뒤로 밀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실감하게 했다. 중단된 강화도 관방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사업이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강화고려역사재단 역시 언제든지 다시 설립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인천생각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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