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흐르고 건물 바뀌어도, 문화는 숨 쉰다]

예산 확보 어려움에 공사 6년만에 설립
1974년 준공…2000년 철거·공원으로
도크 준공일 맞춰 개관…중요성 느껴져

시민관 역할…'제2 시민관' 불리기도
1986년 인천 민주화 운동 상징 공간
현재 '문화창작지대·틈' 세워져 운영
▲ 인천시민회관 초창기 전경.
▲ 인천시민회관 초창기 전경.

인천시민회관은 1974년 4월 13일에 개관하여 2000년 9월에 철거되었으며, 2000년 10월 27일 공원이 조성되었다.

1970년대, 시민회관이 주안에 새로 들어선다는 것은 인천시민들에게 대단히 큰 뉴스였다. 당시 경기도내 유일한 지역신문이었던 <경기신문>은 1974년 4월 15일 자에 6단으로 기사를 크게 실었다. '인천시민회관 준공 _ 13일 준공식, 80만 시민 문화의 전당 다짐'이란 제목을 달았다.

'경기신문'은 시민회관 준공 기념식 기사에 앞서 두 차례나 예고 기사를 내보냈다. 1974년 3월 25일 자 4단 기사로 외관 사진과 함께 실었다. 이 기사에는 착공에서 완공까지 왜 6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는지 그 이유가 나와 있다.

'인천시가 80년대 1백만 인구를 포용한 도시로의 발전을 전제 지난 68년 11월에 남구 주안동 224번지에 착공한 시민회관은 그동안 예산의 뒷받침이 안 돼 계속사업으로 미루어왔었는데 지난해의 1억3500만원 등 2억4500만원을 들여 완공을 보게 된 것이다. 대지 1126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 탑부분 5층 등 연건평 2207평의 맘모스 시민회관은 1388석에 최대 수용 능력만도 2천명이 되는데 시민회관에는 회의장과 영화관람실이 될 홀 외에도 식당 다방 이발소 소회의실 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시는 시민회관의 준공을 내항 도크 준공일과 때마추어 실시될 시민의 날에 개관할 계획이다.'

이 짧은 기사에 많은 정보가 들어 있다. 예산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공사 기간이 6년으로 늘어진 점, 내항 도크 준공에 맞추어 시민의 날 행사를 갖기로 했는데 시민회관 개관도 겸해서 하기로 했다는 점 등이다. 당시 인천 경제의 상징이던 항만 시설에 시민회관을 대등하게 비교했다는 점에서 인천시 당국이 주안 시민회관 개관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가 드러난다. '경기신문'은 또 개관 행사를 하루 앞둔 4월 12일에는 '인천시민회관 6년 만에 준공 _ 13일 기념 음악회'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오후 2시부터 갖는 기념식에 이어 오후 3시부터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기념 음악회가 열린다는 내용이다.

▲ '옛 시민회관 쉼터' 알리는 큰 돌.
▲ '옛 시민회관 쉼터' 알리는 큰 돌.

시민회관 이전에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던 '시민관'이란 시설이 있었다. 가장 빠른 기록은 1956년 12월 31일 제정된 '인천시립 시민관 설치 조례'다. 그 제1조는 '공익상 필요한 제반 집합의 편의와 시장의 문화 생활 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인천시립 시민관을 둔다'고 되어 있다. 2조에서는 시민관을 인천시 송학동 3가 3번지에 둔다고 명시했다. 조례에서 정한 시민관 용도는 '일반 청강(聽講)의 장소 제공', '영화의 상영', '기타 일반 문화행사'로 되어 있다. '시민의 문화 전당'을 자임하던 주안에 있던 시민회관과 같은 목적이었다.

이 시민관의 내력까지 설명하는 자료는 1959년도에 발간된 <경기사전>이다. 여기에서는 인천시 송학동 3가 3번지 '인천시립시민관' 연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당시 관장은 시립도서관장을 맡고 있던 서예가 유희강이었다.

'단기 4255년(1922년) 12월 6일 현 시민관지(址)에 2층 건물로 공회당을 신축하고 사용하였으나 해방 후 시공회당으로 사용타가 6·25 동난으로 인하여 동 건물은 대파되어 사용불능케 됨에 한미친선위원회의 호의와 시민의 부담으로 총공사비 83,306,000원( )으로 가장 우수하고 근대적인 내부시설을 완비하고 좌석 1,163석을 구비한 전국적으로도 굴지의 문화전당으로 단기 4290년(1957년) 3월 1일을 기하여 연와조 3층 건물인 인천시립시민관을 개관하여 시민의 많은 절찬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는 또 연극 횟수를 244회, 입장객 수를 57,069명으로 적고 있다. <경기사전>이 1957년도 자료를 토대로 편찬이 되었기 때문에 이들 숫자는 1957년 3월 개관 이후 연말까지의 통계로 보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 시민관을 제2시민관으로 불렀다. '경기신문' 1974년 3월 25일 자 기사에는 '제2시민관 매각을 검토 _ 인천시 시민관으로서 효용가치 잃어'란 제목의 특기할 만한 내용이 실렸다. 기사는 1단인데 제목은 3단으로 뽑았다.

'인천시는 제2시민관으로 활용도가 없어진 중구 송학동 3가 2번지의 제2시민관의 공매를 검토 중이다. 36년 전인 1938년 일본 육군성에서 공회당으로 신축 인천시에 기증된 동 건물은 시가 제2시민관으로 운영해 왔으나 근년에 와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채 관리인만을 두고 관리해 왔는데 유지비조차 책정 안 돼 건물이 매년 노후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지 2백52평에 건평 1백45평의 일본식 건물의 제2시민관을 시는 효용성이 없어 공매를 검토하게 된 것이다.'

이 기사에 나오는 '제2시민관'이란 용어가 제1시민관과는 어떻게 구분되는지 혼란스럽게 한다. 인천시 역대 조례를 찾아보면 '시민관 설치조례'와 '제3시민관 설치조례'는 있는데, '제2시민관' 관련 조례는 없다. 앞에서 예로 든 1959년도 <경기사전>이나 1973년에 나온 <인천시사>와 1983년에 발간된 <인천개항 100년사> 등을 살펴도 시민관 명칭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다.

1973년에 발간된 <인천시사>에는 '제1시민관'과 '제2시민관'에 대한 설명이 있다. 여기에서 제1시민관 소재지를 '인천시 중구 송학동 3가 3번지'로 특정했다. 시민관 설치 조례나 '경기사전'의 주소지와 같다. 이 시사에 따르면 시민관의 출발은 '인천구락부'인데 관동1가 4번지에 있다가 1922년 12월 16일에 공회당이란 이름으로 송학동 3가 3번지에 새로 세워졌다고 한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중 포격으로 파괴되었고, 건물을 다시 지어 1957년에 개관했다. 1967년에는 이 시민관을 매각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인천개항 100년사>도 1968년 2월 인성여중학교에 매도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 매각한 시민관을 제1시민관이라 칭했고, 그 바로 옆 장소(송학동 3가 2번지)에 또 하나의 시민관을 두고 제2시민관으로 부르면서 1974년까지 운영한 것인지, 아니면 당시 추진하던 매각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았고, 두 번째 건물이기 때문에 제2시민관으로 칭하면서 1974년까지 유지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시민관 관련 조례는 주안에 시민회관이 개관하기 전날인 1974년 4월 12일 폐지됐다. 부평에 있는 것은 조례상으로는 제3시민관이라고 했다. 제1시민관, 제2시민관, 제3시민관. 여전히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인천시가 나서서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민주항쟁 터' 알리는 큰 돌.
▲ '민주항쟁 터' 알리는 큰 돌.

인천시민회관은 민주화운동의 상징 공간이기도 하다. 1986년 5월 3일, 인천시민회관 사거리와 주안역 일대 큰 도로를 사람들이 가득 메워 시위를 벌였다. 노동자, 학생, 시민 등이 군부독재 반대시위에 나선 거였다. 5·3 민주항쟁이라고 부르는 이 시위로 당시 129명이 구속되고 60여 명이 지명 수배자가 되었다. 1년 뒤 전국적으로 휘몰아친 6월 항쟁의 시발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자리, 공원 한가운데에 '다시 부르마, 민주주의여!'라고 적은 '1986년도 인천 5·3 민주항쟁 터'임을 알리는 큼지막한 돌이 세워져 있다.

▲ 옛 인천시민회관 터에 설립된 ' 문화창작지대-틈'.
▲ 옛 인천시민회관 터에 설립된 ' 문화창작지대-틈'.

시민회관은 1994년 4월 8일 남동구 구월동에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하면서 복합문화공간으로써의 그 기능을 넘겨주어야 했다. 시민회관은 전시공간을 리모델링해 새로운 문화공간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은 지 23년 만인 1997년 건축물 구조정밀안전진단 결과 D등급 판정을 받았다. 사용 중지 판정이었다. 결국 2000년 9월 철거되었고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주안 시민회관의 문화공간으로서의 옛 기억은 '문화창작지대-틈'이 되살리고 있다. 2015년 11월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하는 인천콘텐츠코리아랩의 전용시설로 조성되었다. 인천시민들이 문화콘텐츠를 향유하고 더욱 확산시키자는 목적의 시설이다. 이름으로 삼은 '틈'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건축 재료로 쓰인 컨테이너와 컨테이너 사이의 공간을, 사람과 사람 사이, 공간과 공간 사이, 과거와 현재의 시간 사이, 세대와 세대 간의 사이, 창작자와 콘텐츠 사이의 틈을 이어주는 복합 문화 공간을 상징한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대지면적 1237㎡, 연면적 1690.85㎡)로 150명가량 앉을 수 있는 다목적 홀, 전시홀, 교육실, 편집실, 회의실, 스튜디오 등 창작 지원을 위한 여러 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 다른 시민회관이 옛 시민회관 그 자리에서 서 있는 셈이다.

/인천생각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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