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회·문화사업…인천의 든든한 거목]

1975년 탄생 새얼장학회 모태…2021년까지 5954명 지원
새얼문화재단 1983년 설립…올해 40주년 맞아
우현 고유섭 선생 동상 등 인천 인물 기념비 설치
아침대화·백일장·국악의 밤·역사기행 등 행사
황해문화 118호 맞아…학술심포지엄도 호평

 

새얼문화재단은 1983년 설립되었다.

'인천'을 기치로 내건 대규모 문화단체가 인천 땅에서 처음 출발한 거였다. 설립자인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얘기에 따르면, 새얼문화재단 설립 당시 주변에서는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지용택 이사장은 그때 반대하는 지인들을 설득해 재단 출연금을 모으느라 애를 먹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협조를 구하려고 거의 매일 술자리를 가져야 했다.

새얼문화재단의 뿌리는 새얼장학회에 있다.

지용택 이사장이 1975년 전국자동차노동조합 경기도협의회 의장을 맡았을 때 새얼장학회를 만들었다. 우리나라 노동운동계에 장학사업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지용택 이사장은 자동차 노조가 생길 때부터 노조에 몸을 담았다. 인천, 수원, 의정부 지역을 하나로 묶어 활동했다. 당시에는 사고가 나면 버스 운전자들이 구속되었다고 한다. 전체 조직에서 구속돼 있는 운전자가 700명가량 되었다고 한다. 그 운전자들을 돕기 위해 장학사업이 시작되었다. 몇 년이 지났을 때 노동계에서 장학금이 지급된다는 말이 서울까지 퍼졌다. 그 얘기는 청와대에까지 들어갔다. 지용택 이사장이 노동청장과 함께 청와대에 불려갔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한국노총 사무총장직을 겸하고 있던 지용택 이사장은 그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노총 차원에서 장학사업이 펼쳐졌으면 좋겠다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청와대의 지시로 15억 원의 장학금이 한국노총에 지원됐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에 획기적인 장학 시스템이 노총 차원에서 처음 도입되었다.

▲ 1979년 새얼장학금 전달식
▲ 1979년 새얼장학금 전달식

1975년부터 2021년까지 새얼문화재단은 모두 50회에 걸쳐 5천954명의 학생에게 29억1천500여만 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새얼문화재단의 장학금을 받은 청소년들은 '새얼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친목도 다지고 새얼문화재단의 활동과 함께하고 있다. 새얼회는 1989년 5월 결성되어 2021년 기준으로 20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새얼문학회도 있다. 새얼문예창작교실을 수료한 회원들이 뜻을 모은 문학 동인 그룹이다. 1999년 발족했으며 해마다 동인지 <새얼문학>을 발간하고 있다. 문학기행, 문학인 초청 특강, 작품발표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문화진흥을 위한 학술연구활동, 각종 전시회, 공연 사업 등 인천의 문화 부흥을 위한 각종 지원사업도 벌이고 있다.

▲ '그리운 금강산 비'
▲ '그리운 금강산 비'

새얼문화재단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는 흔적은 인천 곳곳에 있다. 특히 인천의 역사 문화 인물을 기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데 그 인물들의 동상이나 기념비를 여러 곳에 세웠다. 그 첫 번째 인물이 우현 고유섭 선생 동상이다. 1992년 9월 인천시립박물관 광장에 세웠다. 2000년에는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를 건립해 인천문화예술회관 광장에 건립하기도 했다. 2016년 4월에는 석남 이경성 선생의 흉상을 제작해 인천시립박물관 내에 설치하였다. 평화통일운동의 선구자인 죽산 조봉암 선생의 석상을 제작하기 위한 프로젝트도 준비하고 있다.

▲ 새얼아침대화 400회
▲ 새얼아침대화 400회

새얼문화재단이 매월 한 차례씩 오전 7시면 어김없이 진행하는 행사가 있다. 새얼아침대화. 1986년 4월 8일 신흥동 정석빌딩 원미장이란 작은 식당에서 새얼아침대화는 시작됐다. 당시 참석자는 21명이었다. 인천사(史) 연구에 매진하던 인하대 박광성 교수가 초대 연사였다. 그 뒤로 매월 한 차례씩 개최했다.

새얼백일장 행사도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986년 5월 31일 제1회 대회를 개최한 이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열고 있는 전국 최대 규모의 순수문예백일장으로 꼽힌다. 제1회 대해에는 141개 학교, 833명의 참가자가 기량을 겨루었다. 2021년까지 모두 14만6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가했다.

청소년에게는 내일에 대한 꿈과 학창 시절의 즐거운 추억을 주고, 어른들에게는 숨겨진 재능을 찾아 삶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도록 이 행사를 계속한다는 게 새얼문화재단의 얘기다. 초등학교 3~4학년부, 5~6학년부, 중학교부, 고등학교부, 일반부에 참여할 수 있고, 시와 산문부를 구분해 시상한다. 새얼백일장은 특히 대안학교나 미인가학교, 그리고 집에서 공부하는 청소년들까지도 참여 가능하도록 참가 폭을 크게 넓혔다. 해마다 수상 작품을 묶어 <새얼문예>를 발간하고 있다.

매년 국악의 밤 행사도 개최하고 있다. 전통 민속 연희의 계승 및 현대적인 재창조를 위하여 국악의 밤 행사를 마련한다는 게 새얼문화재단 측의 설명. 1993년 6월에 처음 마련했다.

전통 클래식 음악공연인 가곡과 아리아의 밤 행사도 있다. 1984년 11월에 첫 무대에 올렸다. 인천 시민을 위한 클래식뮤직페스티벌로 지역의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음악인들이 국내 정상급 성악가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연을 마련해 인천 시민들이 품격 높은 문화를 향유하도록 한다는 게 기획 의도이다.

국내와 세계로 나누어 진행하는 역사기행도 새얼문화재단의 빼놓을 수 없는 프로그램이다. 1986년 백제문화권을 시작으로 우리 강산을 두루 살펴보는 새얼역사기행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는 조국 강산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갖게 하고, 기성세대에게는 삶의 여유와 민족의 자긍심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자는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다. 세계 여러 국가의 문화와 역사를 살펴보는 세계역사기행도 1991년부터 시작했다.

1993년 창간한 계간지 <황해문화>는 2023년 봄호로 통권 118호를 맞이했다.

새얼문화재단이 부정기적으로 마련하는 학술 심포지엄도 그 내용이 좋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1년 6월의 '고려팔만대장경과 강화도', 2008년 10월 송암 박두성 선생 탄생 120주년 기념 심포지엄, 2018년 6월 <황해문화> 통권 100호 발간기념 국제심포지엄 '통일과 평화 사이, '황해'에서 말한다' 등은 학술적 가치가 높았다고 전문가들이 입을 모았다.

새얼문화재단은 2023년 설립 40년을 맞았다.

/인천생각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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