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독일계 세창양행 사택서 개관
초대 관장 이경성 선생 역할 가장 커
인천상륙작전 포화 속 건물 날라가
1953년 제물포 구락부 건물서 재개관
비 샐 정도 관리 어려움 … 예산들여 보수
현재 송도 청량산 자락에 세 번째 둥지
수년내 학익동 옛OCI부지 이전 계획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량로 160번길 26(옥련동), 청량산 자락에 자리한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은 1990년 5월 4일 이 자리에 신축 개관했다. 인천시립박물관의 역사도 우리 현대사만큼이나 사연이 많아 이때가 3번째 건물에 3번째 개관이었다.
인천시립박물관은 1946년 4월 1일 중구 송학동 1가 1번지에서 개관했다. 시립(市立)으로는 국내 최초의 박물관이다. 2022년 11월 기준, 송암미술관(2007년 12월 편입), 검단선사박물관(2008년 1월 편입), 한국이민사박물관(2012년 2월 편입), 인천도시역사관(2017년 12월 신설) 등 4개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초대 관장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률과 미술사를 공부한 27세의 청년 이경성이 맡았다. 1945년 10월 30일 초대 관장 임명장을 받았으니 해방된 지 2개월여 만에 미리 세워 둔 예산 한 푼 없이 준비에 들어가 불과 5개월 만에 인천시립박물관이 탄생한 거였다. 이경성 관장의 회고와 <인천시사> 등에 박물관 설립 과정과 한국전쟁 기간 중 수장품 지키기 비화(_話) 등이 설명돼 있다.
첫 건물은 조선 말 독일계 세창양행 사택이었다. 외관을 이루는 12개의 아치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경성 관장이 주도하는 개관을 위한 건물 보수는 미군정 홈펠 중위가 적극 도와주었다. 조선기계제작소 등 인천지역 주요 공장에서 기증받아 목재와 페인트, 못 등 수리에 필요한 자재를 충당했다.
박물관 수장품은 우선 그 건물에 있던 것들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세창양행 사택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서관으로, 향토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향토관에 선사유적과 개화기의 유물, 사진 등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개관 기념 전시를 위해서 특별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문화재급 작품 19점을 빌려왔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도 60점의 민속품을 빌려와 전시하기로 했다. 이들 두 곳의 국립박물관 수장 유물이 인천시립박물관 개관전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인천박물관을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민속박물관의 분관 형태로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관련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분관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패망 직후 귀국하면서 우리 문화재를 비롯한 온갖 귀중품을 본국으로 가져가려 했다. 그들에게서 몰수한 물건들이 세관 창고에 쌓여 있었는데 이경성 관장의 눈에 드는 것들은 박물관 수장품이 되었다.
옥련동 박물관 앞에 전시되어 있는 중국 종 3구도 이때 수집한 것들이다. 중국 종들은 부평의 일본육군조병창에 있던 것들이었다. 일제가 중국 각지에서까지 공출해 온 철물들에 섞여 있던 것들인데 녹여서 무기를 만들기 직전에 해방이 되는 바람에 이들 종은 겨우 온전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부랴부랴 준비해 개관 당시 진열된 유물은 386점이었다고 한다. 종류별로는 토제품 47점, 도자기 53점, 사품(沙品) 3점, 석품(石品) 28점, 서화류 19점, 목기 2점, 잡류(雜類) 96점, 금속류 25점, 골류(骨類) 1점 등이었다.
인천시립박물관은 개관 전부터 박물관 협의회를 구성해 직원들을 대상으로 매주 금요일마다 공부 모임을 가졌다. 그 내용은 '박물관', '동양화 이야기', '미학노트', '정치와 시인', '음악론', '사진의 역사' 등이었다. 이 강좌를 1946년 1월부터 62개월이나 지속했다.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의 포화 속에 그렇게도 외관이 뛰어났던 박물관 건물이 날아갔다. 그러나 소장 유물들은 다치지 않았다. 유물들을 박물관에 두지 않고 따로 대피시켰기 때문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박물관 건물을 인천 주둔 북한군이 접수한 뒤 중요 소장품을 박물관 직원의 친척이 사는 동구 송림동으로 옮겼다.
인천시립박물관은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53년 4월 1일 중구 송학동 1가 11번지 제물포구락부 건물로 옮겨 재개관했다. 전쟁 중에 재개관을 서두른 것은 박물관 유물이 전쟁통에 다 없어졌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 줘야 했다. 박물관 측은 재개관을 기념해 제1회 고미술전을 개최했다. 이경성 관장은 1953년 박물관 재개관 전 인천시립도서관 관장도 맡았다. 이때 이경성 관장은 동구 송림동으로 옮겼던 박물관 유물들을 도서관으로 다시 옮겨 두었다.
전쟁의 와중에도 박물관에 시민들의 유물 기증은 이어졌다. 1953년 6월 18일 이인섭이라는 분이 신라 토기를, 6월 24일에는 화가 우문국이 고려청자 1점, 조선백자 2점, 묵화(墨花) 단지 1점을, 11월 6일에는 무궁화공민학교 측이 석검 1점, 백자 편 1점을 기증했다. 이처럼 기증 행렬이 이어진 것은 시립박물관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애정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었다.
<경기사전>에서는 개관 준비 개시일을 '1945년 10월13일부터'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1973년 <인천시사> 상권과 1994년 <인천시사> 중권의 내용과 같다.
인천시립박물관은 이경성 관장 주도로 1949년 5월부터 10월까지 5개월 동안 7차례에 걸쳐 인천 전역의 고적조사를 실시했다. 이경성 관장은 그 자세한 내용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세세히 기록하고 남겼는데, 이는 2012년 인천문화재단의 <문화의 창> 시리즈 9권으로 나온 <인천고적조사보고서>로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고적조사가 1965~1966년의 '경서동 녹청자도요지 발굴조사'의 바탕이 되었다. 녹청자도요지는 1970년 사적 211호로 지정되었다. 2002년 녹청자도요지 사료관의 문을 열었으며 2012년에는 사료관을 녹청자박물관으로 확대 개관했다. 1957년의 '주안 고인돌 발굴조사' 역시 이경성 관장의 1949년 고적조사가 기초가 되었다.
1970년대 인천시립박물관은 지붕에 비가 샐 정도로 건물 관리에 애를 먹었던 듯하다. 예산 부족 탓이었다. 짤막한 신문기사 한 꼭지가 당시 어려웠던 상황을 증언한다.
'인천시는 1백23만5천원의 예산을 들여 인천시립박물관의 새는 지붕을 말끔히 보수했다. 인천시 중구 송학동 1~11, 자유공원에 있는 시립박물관은 경기도내에는 유일한 박물관으로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많은 유물이 있으면서도 예산이 없어 건물 보수를 안 해 비가 새는 등 허술한 관리를 보였는데 지난 12일부터 인천시가 1백23만원을 들여 비가 새는 지붕과 홈통 등을 말끔히 보수한 것이다.' (<경기신문> '지붕 말끔히 보수 _ 인천시립박물관 백만원 들여'란 제목의 1977년 7월 26일 자 기사)
습기 등에 가장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박물관에 비가 샐 정도였으니 당시 어려운 상황을 짐작하고도 남겠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천시립박물관이 경기도내의 유일한 박물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니 더욱 안타깝다. 해방 이듬해 문을 연 인천시립박물관이 얼마나 빠르게 박물관으로써의 위용을 갖춘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경성 관장의 역할이 참으로 컸다는 점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이런 어려움을 딛고 인천시립박물관은 청량산 자락으로 이전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인천시립박물관은 몇 년 내로 현재 개발사업이 진행 중인 미추홀구 학익동 옛 OCI 부지 뮤지엄파크에서 새로운 면모로 시민들을 맞이할 예정이다.
/인천생각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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