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 유래
소청도 등대를 돌아 동서로 펼쳐진 소청도 중간 지점에 빵~ 경적 소리와 함께 도착하는 탑동 선착장. 예동(禮洞) 마을은 선착장의 대합실을 지나 경사로를 오르면 정상부 능선을 넘으면서 시작되고, 우체국이 위치한 해안가까지 당산 자락에 가옥들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이 능선부에는 예동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는데, 여기에 예동의 유래가 적혀 있다. “섬이 작아서 예부터 소수의 주민이 이곳에 거주하여 와서 서로 외로움을 달래며 돕고 살아왔는데, 너무도 외로웠던 그들에게는 지나던 상선이나 표류해 온 선박이 정박하게 되면 깍듯이 귀한 손님으로 접대하며 친절을 베풀어 예의를 지켰다하여 이곳을 예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이곳의 행정구역은 인천시 옹진군 대청면 소청1리이며, 노화동(蘆花洞)과 함께 2개의 마을로 구성된 소청도의 중심 마을로서 2022년 7월 말 기준 세대수 143가구이며, 총 185명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대청면사무소 소청출장소를 비롯하여 소청보건진료소, 폐교된 대청초등학교 소청분교가 있었고, 우체국 등 행정 및 숙박 및 편의 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학생이 없어 학교가 폐교되었다는 점이 매우 안타까운 실정이다. 지형이 해안절벽과 암초, 규모가 작은 해수욕장 등이 형성되어 있어 예로부터 이런 지점을 부르는 명칭이 다양했다. 과거에는 '이룻마을'이라 불렀으나 뜻이나 유래는 분명치 않으며, 주변에는 능동, 새거메, 토끼여, 갈밭아래, 빗바위, 너덩여, 절골, 이랑구미, 남쪽 장술, 놋바람받이 등이 있다.
▶ 예동의 문화 유산
예동 마을을 감싸고 있는 당산은 '큰당(서낭당)'이 있어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민간신앙으로 큰 역할을 했다. 현재는 콘크리트 벽에 스레트 지붕으로 내부에는 무신도가 걸려 있다. 그리고 당산 중턱의 김대건 신부 동상과 동백나무 군락지가 있다. 그중 멀리서 눈에 가장 잘 띄는 것은 흰색으로 도장한 김대건 신부 동상이다. 이 동상은 상, 하의 2층 콘크리트 기단 중 상부 기단 위에 세웠으며, 전면에는 1821년 충남 당진에서 출생하여 1846년 새남터에서 처형되기(병오박해)까지 26년간의 종교 활동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그 중 소청도와의 관련은 '1846년(헌종12) 4월18일 중국과 연락차 연평도를 경유하여 소청도를 거쳐 백령도로 해서 중국 어선에게 송신'하였다는 내용이다. 좀 더 들어가 김대건 신부가 처형된 병오박해를 전후하여 조선 천주교의 실정을 살펴보면 1831년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을 중국의 북경교구에서 분리하여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사목을 맡게 된다. 그 결과 1836~7년 사이 프랑스 선교사인 샤스탕, 모방, 앵베르 등이 압록강을 넘어 육로로 입국하지만 1839년 모두 처형(기해박해)된다. 그 후 7년째인 1846년 당시 제3대 조선대목구장이었던 페레올 신부는 육로를 통한 선교사의 입국 금지로 선교활동이 어렵게 되자 김대건 신부에게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한 입국과 포교활동을 명했다. 김대건 신부는 당시 연평도 일대 조기잡이가 유명했기에 어선을 섭외하여 외국신부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연평도, 소청도, 백령도까지 나와 입국을 도우려 했지만 그해 5월 순위도에서 관헌에 붙잡혀 9월 처형됐다. 당시 소청도는 김대건 신부가 외국인 선교사의 입국을 위해 생각했던 섬 중의 하나였으며, 이곳에 1961년 부영발(傅永發) 신부의 노력으로 그의 업적을 기려 동상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소청도에는 2곳의 천주교 공소가 있었지만 현재는 예동 공소만 남아 있고 노화동 공소는 사라졌다.
/김석훈 문학박사·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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