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는 통감부 공보를 통해 고시된 소청도 등대의 점등 시기, 위치, 광달거리, 등탑, 등질, 명호(明弧)에 대해 언급했다. 이것은 소청도 등대를 최초로 소개한 자료로서 진남포 이사청(이사장 秋本豊之進) 고시 제1호이며, 등대국에서 1908년 1월 4일 통지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번 호는 이 등대를 만든 목적과 운영했던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 에 대해 살펴본다.

▲ 소청도 등대 전경.
▲ 일제강점기 소청도 등대(燈臺) 전경.

1. 소청도 등대의 소속

1908년 처음 점등한 후 일제강점기까지 약 40년간 등대를 관리, 감독하던 등대장과 실무 담당자는 일본인이었다. 필자는 점등 후 3년 후인 1911년에 조사된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록(이하 직원록)』을 통해 1911년도의 직원 명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등대는 조선총독부 직속기관-통신관서-등대국-항로표지관리소-항로표지 소속으로 우리나라 전국의 각 등대는 직제상 조선총독부 통신관서 등대국의 직속 기관이며, 이 당시 항로표지관리소장은 靑山鼎之助(아오야마 세이노스케, 技師)이다. 『직원록』에 기록된 전국의 40개의 유인 등대나 등표 중 소청도 등대의 위상은 어떨까?

 

2. 소청도 등대 등대장과 직원

등대장은 누구였을까? 『직원록』에 의하면 등대 근무 직원은 澤田源六(사와다 겐로쿠), 杉尾畩市(스기오 타케시), 田部幸三郞(타베 코오조오), 橫山勘藏(요코야마 칸조오), 堀金信雄(호리카네 노부오) 등 5명이며, 澤田(사와다)는 首員 겸 通信技手, 杉尾(스기오)는 補員 겸 通信技手, 田部(타베)는 補員 겸 通信技手, 橫山(요코야마)는 補員, 堀金(호리카네)는 補員인 점으로 보아 首員인 澤田이 등대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와다가 소청도 등대의 첫 번째 등대장인지 알 수 없다. 한편, 이 당시 전국의 40개 유인 등대나 등표의 직원은 보통 1~3명이 확인되고 있어 소청도 등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관직은 모두 ‘항로표지간수(航路標識看守)’이다.

 

3. 소청도 등대와 무선전신소

소청도 등대는 등대 이외 다른 역할이 없었을까? 이 당시 소청도에는 무선전신소가 있었는데, 앞서 언급한 등대 직원 澤田, 杉尾, 田部 3인은 모두 通信技手로서 무선전신소의 근무도 겸하고 있었다. 한편 전국적으로 무선전신소가 설치된 곳은 소청도, 월미도, 목포, 항문도(港門島, 현 당사도), 등대 순시선인 광제환(光濟丸)의 5곳이었지만 광제환을 제외하면 4곳이 모두 서해 연안에 분포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지금도 소청도 현지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숲속에는 일본에서 전선을 깔다가 만 잔재가 있고, 약 80m 되는 안테나가 있었다는 점이 무선전신소와 무관치 않다.

결국 동일한 인물이 등대와 무선전신소의 근무를 겸하면서 2가지 역할을 하였고, 위상도 커 다른 유인 등대에 2배 정도 많은 직원이 근무하였던 것이다.

 

4. 소청도 등대의 건립 목적

우리나라에 등대가 설치되는 계기는 조선의 각 항구에 등탑과 부표를 건설해야 한다는 『조일통상장정』이며, 일본의 요구에 의해 1883년 체결되었다. 이후 1895년 정부 관제 개편시 『해운 및 항로표지에 관한 사무』를 담당할 부서가 ‘공무아문 관선과’로 결정되자 일본은 우리나라 연안 30개소에 항로표지 설치를 위한 위치조사와 사업계획서를 제출하였다. 그 결과 등대 설치 계기가 마련된 후 20년 뒤인 190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팔미도 등대가 건설됐고 이어서 더 북쪽에 소청도 등대도 완성했다.

이후 일본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 수탈을 위한 책략을 다방면에서 공고화했으며, 1940년대 2차 세계대전 당시는 항로표지 시설을 군사시설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상에서는 등대와 무선전신소의 설치로 조선을 수탈하고 청국의 침략 발판을 위한 사전 작업을 추진한 것이었다.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 김석훈 문학박사·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김석훈 문학박사·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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