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청도등대 전경.

등대(燈臺, lighthouse)는 항해하는 선박이 육지나 배의 위치를 확인하고자 할 때 사용하거나 항만의 소재, 항(港)의 입구 등을 알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연안의 육지에 설치된 등화를 갖춘 탑 모양의 구조물을 말한다. 흔히 등대는 바다를 비춰 길을 밝혀주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등대는 암초 같은 위험한 장애물이 있어 피할 상황에 “나, 여기 있다.”라고 항해하는 배에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짓는 시설이다. 즉 등대는 길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로 오지 말라고 알리는 신호기인 것이다.

우리나라 서해 최북단에 위치한 소청도 등대. 소청도의 서쪽 끝인 당안이코쟁이의 주변은 가마우지 서식지로 안성맞춤인 가파른 해안절벽과 시퍼런 바다의 망망대해로 둘러싸인 해발 83m의 해안지형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1903) 보다 5년 늦게 건립(1908)되었지만 114년의 긴 역사를 간직한 소청도 등대. 그리고 이곳은 설립 당시부터 유인등대였기에 관계자들에 의한 많은 역사와 에피소드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 등대 관련 소식을 최초로 언급한 대한제국기의 통감부(統監府)는 1908년 1월 18일(토)자 기관지인 공보(公報) 제37호에 '한국 서해 황해도 소청도 등대 및 무적(霧笛, 고동=사이렌)의 신설'이란 제목 하에 등대 관련 소식을 전하고 있어 전재(全載)한다.

 

▲통감부 공보에 담긴 소청도 등대 내용

1. 1908년 1월 11일부터 한국 서해안 소유독각(小乳纛角 ; 지형의 특징으로 추정)의 남방에 있는 대청군도 소청도의 남서쪽 끝에 건설한 등대에 대하여 매일 밤 일몰부터 일출까지 점등 또 고동(霧笛, 안개가 낄 때 경고 신호)은 안개와 눈(霧雪) 기타 어둡거나 가랑비 내리는 기후(天候)에 울림(등대의 가동 시간 및 항해 안내 유형)

1. 등대의 위치는 일본 수부(水部)에서 간행한 해도(海圖) 제326호에 의하면 북위 37° 45′ 36″, 동경 124° 43′ 45″임(등대의 위치)

1. 등탑(燈塔)은 콘크리트조 원형으로 백색이며, 그 높이는 기초부터 등화(燈火)까지 33척(약 10m)(등탑의 높이)

1. 등화는 제 3등의 연속으로 번쩍이는 백색등(連閃白色燈)으로 하고, 매 20초 간격으로 4번의 섬광(등질)

1. 등화의 중심은 고조(高潮) 평균수면에서 높이 268척으로 하고, 밝은(晴朗) 밤에 수면 위 15척에 있는 관측자가 23해리(42.596㎞, 약 100리)의 거리에서 불빛을 봄(광달거리)

1. 등화는 S78°25′W부터 서, 북, 동을 거쳐 S39°20′E까지 242° 15′ 사이를 비춤(명호)

1. 고동(霧笛)의 원동력은 석유발동기로 하고 압착공기에 의해 매 30초를 지나 5초 동안 울림

 

통감부의 공보에서 소청도 등대는 1908년 1월 11일부터 점등을 시작했으며, 이 사실을 일주일 후 공보에 게재했다. 신설 당시부터 소청도의 기후 상태에 따라 빛과 소리의 형태로 항로를 안내했으며, 불빛의 주된 방향은 북서~북~북동 방면이다. 등탑은 10m 높이의 원형이며 표면은 흰색이다. 등화는 20초 간격이며, 그 사이에 4번의 섬광으로 소청도 등대임을 알리면서 항해를 도왔다. 고동 소리를 내기 위한 발동기는 석유 이용 등 당시 110년 이전의 우리나라 등대 발전 과정을 엿볼 수 있는 해양문화 자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며, 주변 지역 콘텐츠와 함께 소청도를 알리는 관광 상품으로 널리 알려지길 기대한다.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 김석훈 문학박사·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김석훈 문학박사·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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