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로 둘러싸인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과학자들이 모여들었다.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리처드 파인만, 유진 위그너, 존 폰 노인만 등 오늘날 물리학, 화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당대 최고의 천재 과학자들이 극비리에 하나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놀랍게도 이 무리에서 노벨상 수상은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었는데, 이들 중 무려 21명이 이미 노벨상을 수상했거나 후에 노벨상을 수상할 정도로 전무후무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을 이끌었던 수장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그 흔한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발명품으로 기록된 원자 폭탄이었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석학들을 진두지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가 끝내 노벨상을 받지 못한 이유는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핵무기가 인류 발전에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한다는 노벨상 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 미국이 다급하게 전 세계의 과학자들을 불러모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독일은 세계에서 핵물리학이 가장 발달한 나라였다. 1938년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스트라스만이 핵분열(nuclear fission)을 발견하였고 리즈 마이트너와 오토 프리쉬의 이론적 설명은 원자 폭탄 개발의 가능성을 높였다. 이에 독일에서 곧 원자 폭탄을 제조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1939년 8월 헝가리 태생의 물리학자 레오 실라드와 유진 위그너는 당대 가장 영향력 있던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빌려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독일이 새로운 유형의 매우 강력한 폭탄을 개발할 수 있음을 시사하며, 미국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루스벨트는 독일보다 앞서 원자 폭탄을 만들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일명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을 지시하였다.
맨해튼 계획은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 캐나다가 참여하였으며, 1급 군사 작전이었기에 철저히 비밀리에 추진되었다. 이 계획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원자 폭탄을 원자 폭탄이라 부르지 못하고 물건이나 장치, 심지어는 그것이라고 불렀다. 또한 당시 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조차도 나중에 대통령이 되고 나서야 이 프로젝트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만큼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원자 폭탄 개발의 총 책임자는 오펜하이머였지만, 전체 프로젝트의 관리는 미국 육군의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이 맡았다. 이는 맨해튼 계획은 단순히 폭탄 개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금액인 20억 달러의 예산을 관리하고 철저한 기밀 유지가 필요하며, 개발 및 실전 투하 일정 등을 조율해야 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오각형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 건설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그로브스와 양자역학과 천체물리학에서 뛰어난 연구 성과를 낸 오펜하이머가 협력한 맨해튼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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