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리코 페르미는 적절한 가정을 통해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여 대략적인 답을 추정하는 데에 탁월하였다.

원자 폭탄은 뜨거운 열기와 함께 강력한 후폭풍을 몰고 왔다. 폭발 압력으로 폭심지로부터 구형으로 충격파가 형성되었으며, 이때 화구(火球)는 폭발력으로 대기를 밀어내는 힘과 주변 대기가 막는 힘의 균형이 맞춰지는 크기로 결정된다.

유체역학에 큰 업적을 남긴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 제프리 테일러는 신문에 실린 원자 폭탄의 폭발 후 사진만 보고 차원 해석을 통해 폭발 에너지를 계산하였다. 차원 해석은 어떤 현상과 관련된 물리 변수들을 도출하고, 이들을 구성하는 기본 차원을 살펴 변수들의 관계를 개략적으로 파악하는 수학적 방법을 말한다.

테일러는 우선 폭발로 인한 충격파가 구형으로 확산하며, 화구의 반경은 폭발 에너지, 공기 밀도,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하였다. 그리고 이 변수 4개를 조합하면 무차원 변수가 한 개 도출된다. 따라서 폭발 에너지와 공기 밀도가 일정한 경우, 화구 반경은 시간의 5분의 2제곱에 비례하여 증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처럼 어떤 특정 상황에 적절한 변수들을 파이 그룹이라고 불리는 무차원 그룹으로 형성시키는 차원 분석의 한 방법을 버킹엄 파이 이론(Buckingham π theorem)이라 한다.

1914년 미국의 물리학자 에드거 버킹엄이 제안한 이 이론에 따르면 n개의 1차적 기본 차원을 포함하는 m개의 독립 변수는 m-n개의 무차원 변수를 만들 수 있다. 이는 유체의 흐름을 나타내는 여러 변수로부터 무차원 수를 얻을 수 있으며, 변수가 줄어든 만큼 전체 실험 횟수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테일러가 폭발 사진만 보고 원자 폭탄의 위력을 계산한 것과 달리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는 종이 한 장으로 그 위력을 추정하였다. 원자 폭탄의 실전 투입 전 트리니티 실험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었던 그는 충격파가 몰려올 즈음 종잇조각을 공중에 날렸다. 약 2.5m를 날아간 종잇조각은 잠시 후 땅에 떨어졌고 페르미는 그 변위로부터 핵폭탄의 위력을 추론했다. 값비싼 계측 장비 없이 종이와 연필만으로 대략적인 실험 결과를 빠르게 예측한 낭만의 시대였다.

당시 페르미가 추정한 값은 10kt였는데, 실제 폭탄의 위력은 20kt 정도였다. 두 배 차이가 나긴 했지만 지금처럼 정밀한 컴퓨터 계산이 불가능했던 시대에 단순 계산으로 얻은 값 치고 상당히 높은 정확도라 평가받았다. 페르미가 사망한 지 70여 년이 지난 2021년 미국 워싱턴대학교 물리학과 조나단 카츠 교수는 페르미가 남긴 메모로부터 그가 어떤 과정을 통해 원자 폭탄의 위력을 계산했는지 추측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기초 지식과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단시간 내에 답을 구하는 방식을 페르미 추정(Fermi estimation) 또는 추측과 평가를 합쳐 게스티메이션이라 부른다.

이는 한때 외국 기업의 면접시험에서 지원자들의 논리적 사고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질문으로 널리 알려졌다. 예를 들어 버스에 골프공이 몇 개 들어갈까? 뉴욕의 피아노 조율사는 몇 명일까? 바닷물의 무게는 얼마일까? 와 같은 질문으로, 정확한 답을 맞추는 것보다 적절한 가정을 통해 논리적으로 답을 도출하는 과정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페르미 추정은 특히 공학 설계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최종 설계 단계가 아닌 중간 과정에서는 오랜 시간을 들여 정확한 수치를 구하는 것보다 대략적인 값이라도 추론하여 빠른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송현수 과학 저술가·공학박사.
▲송현수 과학 저술가·공학박사.

/송현수 과학 저술가·공학박사



관련기사
[송현수의 역사 속 과학 이야기] 태양보다 밝은 빛 (중) 맨해튼 계획의 결과물로 길이 3m, 직경 71㎝, 무게 4t의 원통형 원자 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만들어졌다. 리틀 보이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별명으로 이름과는 달리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폭탄의 폭발력은 약 15kt 수준인데, 이는 폭약으로 널리 알려진 트라이나이트로톨루엔, 일명 TNT 1.5만t의 위력을 의미한다. 리틀 보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로 이후 핵무기 위력의 기준이 되었다.1945년 7월 미국, 영국, 중국의 대표가 독일 포츠담에 모여 일본의 항복 조건과 점령지 처리에 관해 발표한 [송현수의 역사 속 과학 이야기] 태양보다 밝은 빛(상) 1942년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로 둘러싸인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과학자들이 모여들었다.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리처드 파인만, 유진 위그너, 존 폰 노인만 등 오늘날 물리학, 화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당대 최고의 천재 과학자들이 극비리에 하나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놀랍게도 이 무리에서 노벨상 수상은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었는데, 이들 중 무려 21명이 이미 노벨상을 수상했거나 후에 노벨상을 수상할 정도로 전무후무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들을 이끌었던 수장 로버트 오펜하이 [송현수의 역사 속 과학 이야기] 냉전 시대의 우주 경쟁과 탐험 (하) 챌린저호의 폭발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다. 미국 정부는 사고 과정과 원인을 면밀히 조사하기 위해 즉각 대통령 산하 사고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회장으로 전 국무장관 윌리엄 로저스, 부회장으로 은퇴한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을 비롯하여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 등 각계 전문가들이 위원으로 다수 참여하였다.하지만 15㎞ 상공에서 터져 시속 300㎞로 바다에 떨어진 거대한 기계 장치의 잔해로부터 사고 발생의 원인을 찾는 작업은 무척 어려웠다. 사고조사위원회는 청문회를 비롯하여 수 개월 간의 조사 끝에 마 [송현수의 역사 속 과학 이야기] 냉전시대의 우주경쟁과 탐험 (중) 미국의 달 착륙 선점으로 우주 경쟁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1960년대를 보낸 NASA는 영광스러운 승리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소련과의 경쟁이 사라지며 우주에 대한 관심도 식고, 예산 역시 급격히 감소한 것이다. 임무를 충실히 완수한 NASA는 줄어든 예산만큼이나 그 역할도 축소되었다.실제로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우주 기술 선도에 대활약을 한 NASA는 우주 경쟁의 라이벌이던 소련이 망한 이후 연구비 지원이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경쟁이 최고조에 달하던 1966년 미 연방 예산의 [송현수의 역사 속 과학 이야기] 냉전시대의 우주경쟁과 탐험 (상) 1957년 10월4일 소련 상공에 수박만 한 공 하나가 높이 떠올랐다. 그 공은 곧 지구로 우주 최초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삐...삐...삐...삐...” 별다른 뜻 없는 짧은 신호였지만 미국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신호를 보낸 공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부한 미국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공은 소련이 쏘아 올린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Sputnik)였다. 미국인들은 스푸트니크를 만든 나라가 경쟁국 소련이라는 사실에 더욱 큰 공포를 느꼈다. 인공위성에 핵무기를 올려 아메리카 대륙에 떨어뜨릴 수 [송현수의 역사 속 과학 이야기] 로마 제국의 수도교 (상) 고대 로마 제국이 2000년 넘게 강대국으로서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상하수도의 발달 덕분이었다. 로마는 도심에서 먼 수원지로부터 맑은 물을 끌어와서 목욕탕과 분수 같은 공공 건축물에 공급하고, 시민은 마을 구석에 있는 급수장에서 물을 길었다. 당시 로마 시민 한 명의 1일 물 사용량은 약 180ℓ였는데, 이는 오늘날 이탈리아의 1인당 물 사용량인 234ℓ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이처럼 경이로운 급수는 수로 덕분에 가능했다. 수로를 건설하고 물을 효과적으로 운반하기 위해 건축학과 유체역학 지식이 총동원되었다. [송현수의 역사 속 과학 이야기] 로마 제국의 수도교 (중) 바람이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부는 것처럼 유체는 항상 압력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물도 압력 차이만 있다면 지대가 낮은 지역에서 높은 지역으로 역류할 수 있다. 하지만 인위적인 압력으로 유체를 이동시키는 펌프가 발명되기 전에는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자연 현상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고대 로마의 수로가 계곡을 지날 때 하강과 상승을 피하기 위해 수도교를 짓기도 하였지만 공사가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물을 흘려 보냈다. 바로 역사이펀(inverted siphon) 작용이다. [송현수의 역사 속 과학 이야기] 로마 제국의 수도교 (하) 고대 로마에 이미 상수도 시설이 정비되었지만 16세기 유럽 도시의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마실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영국 런던은 템스강의 오염으로 강물을 마실 수 없게 되어 먼 곳에서 깨끗한 물을 끌어와야 했다. 이를 위해 1613년 수도 회사 뉴리버가 설립되었다. 뉴리버는 런던 전역에 상수도관을 설치하고 가정에 물을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회사 이름 그대로 런던 시민들에게 새로운 강이 된 것이다.1830년대에는 유럽에 콜레라가 크게 유행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콜레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빠르게 전 세계로 확산된 질병이 [송현수의 클리닝 사이언스] 무질서 법칙에 반하는 청소의 과학 새해를 맞이하여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공간을 깨끗이 하는 청소의 과학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류의 탄생 이후 의식주와 더불어 기본적인 생활에 빠질 수 없는 필수 요소가 청소다. 고대부터 수천, 수만 년에 걸쳐 방식만 달라졌을 뿐 청소는 지역과 시대를 불문하고 불가결한 작업으로 여겨졌다. 현대 과학 기술은 빗자루와 걸레보다 진공 청소기와 로봇 청소기가 더 친숙할 정도로 청소 도구와 기계를 혁신적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청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그렇다면 청소란 무엇인가? 청소의 [송현수의 클리닝사이언스] 먼지 없는 공간 '청정실' 모든 공간은 깨끗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공간은 다른 공간보다 더욱 깨끗해야 한다. 음식물을 다루는 식당, 오염원에 취약한 환자가 있는 병원 그리고 반도체 소자를 생산하는 공장이 특히 그러하다. 자그마한 불순물이 곧바로 배탈, 감염, 불량이라는 크나큰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간을 엄격히 관리하기 위해 단순히 먼지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먼지 개수로 깨끗한 정도를 수치화한다. 그뿐만 아니라 온도, 습도, 그리고 압력을 원하는 수준으로 제어하는 공간을 청정실(clean room)이라 한다.청정 기준은 CLASS 등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