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이펀 작용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활용된다.
▲ 사이펀 작용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활용된다.

바람이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부는 것처럼 유체는 항상 압력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물도 압력 차이만 있다면 지대가 낮은 지역에서 높은 지역으로 역류할 수 있다. 하지만 인위적인 압력으로 유체를 이동시키는 펌프가 발명되기 전에는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자연 현상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 로마의 수로가 계곡을 지날 때 하강과 상승을 피하기 위해 수도교를 짓기도 하였지만 공사가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물을 흘려 보냈다. 바로 역사이펀(inverted siphon) 작용이다. 일단 사이펀은 대기압을 이용하여 높은 곳에 있는 액체를 중력에 반하여 위로 끌어 올린 다음 아래쪽으로 계속 이동시키는 연통관을 말한다. 이는 별도의 기계 장치 없이 자연적으로 유체가 이동하는 현상이다. 높은 위치의 액체 표면에 작용하는 대기압은 사이펀 내의 압력보다 높기 때문에 초기에 관의 반대편 끝을 한 번만 흡입하면 액체가 저절로 움직인다.

사이펀의 원리는 매우 오래전부터 활용되었는데, 대표적으로 고대의 유압 기기인 헤론의 분수(Heron's fountain)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기계학자 헤론이 만든 분수는 외부 에너지 없이 물이 뿜어져 나오는 장치로, 대기압을 이용해 위치 에너지를 운동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원리로 작동한다. 현대 사회에서 사이펀을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은 화장실이다. 양변기에 물이 저절로 차고 비워지는 원리가 바로 사이펀 작용이다. 또한 맥주나 와인을 주조할 때 위에 뜬 찌꺼기나 거품 등을 간단히 제거하는 데에도 사이펀이 쓰인다.

사이펀을 이용한 물건 중 계영배(戒盈杯)라는 독특한 술잔이 있다.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잔에 술을 70% 이상 따르면 압력 차이로 인해 잔 중앙의 기둥 속에 숨은 관으로 술이 모두 샌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사자성어를 그대로 보여주는 술잔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임상옥은 도공 우명옥이 만든 계영배를 평생 곁에 두고 과욕을 경계하여 최고의 거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참고로 서양의 피타고라스 컵(Pythagorean cup) 역시 동일한 원리다.

이처럼 매우 오래전부터 사이펀이 다방면에 활용되었지만 놀랍게도 그 정확한 원리는 최근까지도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현재 두 가지 가설이 존재하는데, 첫째는 유체가 사이펀 출구로 나오면서 사이펀의 윗부분에 거의 진공 수준의 저압이 형성되고 동시에 입구의 대기압이 유체를 밀어 올린다는 가설, 둘째는 사이펀 출구로 떨어지는 유체의 질량이 사이펀 내 존재하는 유체에 인력을 가하여 끌려온다는 가설이다.

사이펀이 초기 위치에서 담장 등을 넘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자' 형태라면, 역사이펀은 계곡에서처럼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자' 형태다. 사이펀과 역사이펀 작용은 대기압이 공기를 누르는 힘에 의해 물이 배관을 통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중간 경로의 모습은 서로 반대다. 납으로 만든 폐쇄형 수로는 역사이펀 작용으로 계곡을 건너 물을 운송할 수 있었다.

▲ 송현수 과학 저술가·공학박사.
▲송현수 과학 저술가·공학박사.

/송현수 과학 저술가·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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