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운노조는 내 가족 … 선출될 새 위원장 중심 단합하길"

 

▲ 지난달 30일 인천 중구 인천항운노동조합 위원장실에서 이해우 위원장이 40년 인천항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인천항 40년 근무 … 이 달 퇴임 앞둬
현장지지로 위원장에 … 12년 이끌어
상용화 아픔·화주 갑질 투쟁 함께해


한국지엠·중고차 빠지면 항만 타격
사회적 책임다하고 시민과 지켜내야


인천항에서 40년을 지냈다. 젊은 나이에 결혼 후 인천으로 올라와 1년만 일할 참이었다. 결국 가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에 연탄과 쌀을 어깨에 둘러멨다. 노동하는 삶은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으로 이어졌다. 이제 임기를 마치고 퇴임을 앞둔 이해우(69) 인천항운노동조합 위원장은 "어느새 인천항에서 가장 연장자가 됐다. 지금도 인천항 구석구석을 내가 잘 안다고 자부한다"라며 "곧 선출될 새 위원장을 중심으로 조합이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이달 말 퇴임한다. 2007년부터 12년간 항운노조를 이끌며 조합원 권익 보호와 인천항 현안에 앞장섰던 그였다. 영광스러운 순간도 있었지만 가슴 찢어지는 아픔도 함께 했다. 퇴임을 앞두고 항운노조와 함께한 그의 인생을 들어봤다.


▲고난한 항만노동자, 항운노조를 만나다

그는 1950년 3월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의 상흔이 한반도를 할퀼 때다. 가족 중 현충원에 모신 분이 세 분이나 된다고 한다. 이 위원장의 자녀도 직업군인의 길을 택했다. 그는 국가 안보에 투철한 정신을 가진 집안이었다고 회고했다.

인천에 올라오게 된 계기는 결혼 때문이었다. 인천에 계신 작은아버지가 중매를 섰다. 1979년 3월 결혼 후 인천으로 올라와 인천항을 만났다. 하역노동자로 살아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1년만 일하고 장사를 하려던 생각이었다.

"나는 가난하고 배운 게 없었어요. 가난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죠. 저는 항만에서 일하고, 집사람은 새벽 4시 동대문 시장에서 옷을 떼다가 중앙시장에 팔았어요. 맞벌이다보니 애는 혼자 컸죠. 수입이 좋았고 적성에 맞아서 1년, 2년 지내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항만노동자의 삶은 고됐다. 무연탄이며, 곡물이며, 심지어 유황까지 배에서 들어 부두로 내렸다. 시멘트 50㎏ 포대 1만개를 8명이 배에 올릴 때도 있었다. 기계가 없던 시절이었다. 햇볕에 달궈진 시멘트는 노동자의 피부를 태웠다. 그는 막걸리와 돼지고기의 기운으로 일했다고 한다.

"죄다 삽으로 퍼냈어요. 원목에 와이어를 걸어 작업했고요. 유황을 삽으로 퍼내는 건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고난 중 고난이었어요. 그러다 만난 곳이 항운노조예요. 조합원에게 돌아가며 일을 나눠주다 보니 항운노조에 가입하면 최소한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었죠. 자유노동이 가능했던 곳이었어요."


▲조합원에서 위원장까지
사회 분위기 때문일까. 항운노조에도 '매관매직'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노동하는 조합원으로 살았다. 열심히 일하니 자연스럽게 선배들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보통 반장, 사무장, 조장이 되려면 윗사람 눈에 잘 들어야 하고 부탁도 해야 될 때였죠. 그런데 절 잘 봐주신 모양인지 자연스럽게 올라갔어요. 주변에서 위원장에게 로비를 엄청나게 할 때였죠. 소장 자리가 하나 빌 때였는데, 이강희 전 위원장께서 집행부로 올라오라고 절 부르시더군요. 그러곤 소장으로 임명하셨어요."

이 위원장은 조합원을 관리하고 지휘하기보다 가족같이 지냈다고 회고했다. 같이 막걸리를 마시고, 뒹굴고, 밤을 새우고, 돼지고기에 소주를 한 잔 마시면 그게 항운노동자의 삶이었다. 그렇게 조직부장을 거쳐 부위원장까지 올랐다고 한다.

2005년, 어두운 그림자는 결국 전국 항운노조를 덮쳤다. 매관매직 문제가 검찰 수사 선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인천도 태풍을 피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죗값을 치를 때 정도를 넘지 않았던 이 위원장은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07년 5월 그는 쓰러져가는 조직을 추스르고 위원장에 도전한다. 하지만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옛 집행부 소속이었다는 이유에서다.

"다행히 현장 조합원들이 저를 지지했어요. 현장에서 가족처럼 지냈던 모습을 좋게 봐주셨던 거죠. 현장 반장과 대의원들은 저를 지지하는 결의서도 냈어요. 그때 대의원이 56명이 있었는데, 전원 위원장 취임에 찬성해 주셨죠."


▲아픔과 투쟁 함께했던 위원장 12년

위원장의 삶도 만만치 않았다. 2007년 10월 항운노조에 상용화의 바람이 불었다.

상용화란 항운노조가 가지고 있던 노무공급권을 박탈하고, 하역사별로 인력을 고용할 수 있도록 개혁하는 제도를 뜻한다. 갈등은 극심했다. 항운노조도 내부적으로 찬성과 반대로 갈라섰다. 상용화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자유노동을 하던 노동자가 회사 소속이 되면 해고될 수 있다고 봤다. 찬성하는 측은 정년 보장과 안정적인 일자리를 원했다.

"반대하는 조합원이 한강다리에 올라가서 상용화 반대를 외칠 때였어요. 저는 노동조합을 믿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정말 힘겹고 어렵게 상용화를 이뤘어요. 하지만 758명의 조합원이 항운노조에서 이탈하고 정부가 준 생계안정지원금을 받았죠. 인천항 신협 앞에서 돈을 받아가던 사람들이 아직도 기억나요."

대형 화주들이 하역사에게 '갑질'할 때에도 항운노조가 나서곤 했다. 화주들은 하역 요금을 최대한 깎길 원한다. 심지어 정부가 고시한 요금도 안 주겠다는 경우도 있다. 당연히 조합원에게 돌아가는 임금도 적어지고, 하역사는 경영에 타격을 입게 된다. 항운노조는 이럴 때도 나섰다.

"화주들은 왜 하역사와 요금을 협상하는 데 항운노조가 개입하느냐고 하지요. 하지만 항만·항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당신들이라고 주장했어요. 그렇게 많이 싸웠어요. 터미널에 텐트 치겠다, 공장 앞에서 집회하겠다고요. 하역사들도 많이 고마워했죠."

그는 그동안 강한 추진력과 리더십으로 앞만 보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좌우와 뒤를 돌아봐야 할 때도 분명히 있었다.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는다고 한다. 조합원들을 챙기지 못했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개인적으로 상처를 받으신 분들이 있죠. 아쉬움이 남습니다. 뒤가 어떻든 앞만 보고 갔기 때문이에요."


▲"항운노조의 힘은 단결과 조직 … 다음 위원장과 한 목소리 내야"

항운노조는 아직 건재하다. 하지만 대내외 환경은 만만치 않다. 수도권 규제로 물류 흐름이 지방으로 바뀌고 있다. 공장이 줄고, 물량도 감소한다. 컨테이너가 늘어도 항운노조 조합원의 힘이 필요한 벌크화물은 줄어들고 있다. 물량이 많아져야 조합원의 먹거리도 늘어날 수 있다.

"한국지엠과 중고차가 정말 중요한 화물입니다. 이들이 빠져나가면 항운노조는 물론 항만 경제에 크게 타격을 입게 돼요. 시민들이 같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러려면 항운노조가 사회적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어요. 지역사회로부터 존경받는 노동조합이 되도록 노력해야죠."

이 위원장은 오는 27일 대의원대회가 끝나면 항운노조를 떠난다. 항운노조는 그의 집이자 가족이자 인생이었다. 떠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는 퇴임 후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항운노조의 단결을 강조했다. 새로 당선되는 후임 위원장이 중심으로 조합을 이끌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새로운 위원장에게는 조합원 권익보호와 근로조건 개선은 물론 우리나라의 경제와 하역사의 어려운 점을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투쟁도 중요하지만 협의와 소통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조합이 안정돼야 합니다. 새로운 위원장을 중심으로 뭉쳐서 단결하고, 조직이 모여야 합니다. 새로운 위원장은 지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정책을 설명하고,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노동조합의 힘은 단결이고 조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2년간 저에게 모든 것을 맡겨주시고 따라주신 우리 조합원 동지께 무엇보다 감사드리고 싶어요."

/박진영 기자 erhist@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