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석의 지구촌./인천일보DB

“오늘날 경제 성장은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 발전을 위한 생산 계통에서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특히 의류계통에서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의 평균 연령은 18세입니다. 가장 잘 가꾸고 보살펴야할 시기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성장기의 제일 어려운 고비인 것입니다. 기업주들은 폭리를 취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 이 같은 현실을 묵인하는지 바삐 선처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1969년 12월19일 평화시장의 봉제노동자 전태일이 근로 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를 요약한 글이다.

▶그로부터 1년 후 조선일보 프랑스 특파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필자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자살한 23세의 청년 전태일의 비보를 프랑스 국영 통신사 AFP의 편집실에서 접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세르팡 기자가 보여준 서울발 젊은 근로자의 분신자살 기사를 보면서 30대초의 한국 언론인이었던 필자는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 우리 사회를 좀 더 밝고 공정하게 만드는데 힘써야겠다는 결의를 하게 된 날이 1970년 11월13일이었다.

▶매년 전태일 열사 기일에 찾아가는 남양주시 모란공원의 묘소에는 52주기가 되는 날이어서인지 많은 추모의 꽃다발이 놓여있었고 노동법 책자를 꼭 껴안고 있는 전태일은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도 모란공원 묘소를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 것을 보면서 아직도 우리 공동체가 전태일 정신을 숭모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울 청계천로(관수동)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기념관'에서는 '꽃다지 30주년' 특별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단결 투쟁가'부터 밝고 희망찬 '바위처럼' 그리고 '노래의 꿈'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고 불러온 노동가요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엿볼 수 있는 전시회였다. 이른 봄날 들판에 흐드러지게 피는 들꽃 꽃다지처럼 험할 수밖에 없는 노동운동의 현장을 희망의 노래로 승화시켜온 꽃다지 모임은 근년에는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3권을 알리는 순회 콘서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우리가 23세에 생을 마감한 전태일을 잊지 못하고 잊어서도 안 되는 것은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신보다 힘든 동료와 이웃을 향해 베풀었던 끊임없는 온정때문일 것이다. 그는 또 부당한 현실을 극복하며 개선하려는 의지와 대안까지 제시하면서 숨을 거두기 전에 어머니에게 자신이 못 다한 일을 이루어 달라고 애소했다. 그 후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탄압과 구속을 인내해가면서 1987년에는 노동조합의 합법화를 이루어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장한 어머니 이소선의 영정 앞에서 오랫동안 머리를 숙였다.

▲ 신용석 언론인.<br>

/신용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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