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고타이어를 쓴다. 오른쪽 뒤 타이어에 바람이 자꾸 빠져서 살펴보니 표면이 A4 용지 한 장을 새로 꺼낸 것 처럼 맨질하다. 거의 시내주행만 하는 터라 며칠을 미루다가 결국 단골로 가는 중고타이어 가게에 들러 앉아있자니 '카톡!' 메시지가 하나 도착한다.
지난 주말 필리핀은 풍속이 시속 90㎞에 달하는 태풍 '날개'로 사망자 132명에 가옥 6500여채가 파손되고 총 240만명의 주민이 피해를 입은 재해가 있었다. 남부를 휩쓸고 지나가 이곳 팜팡가 쪽은 비교적 피해가 덜했으나 세찬 바람과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는 마치 이곳이 태풍의 주경로인 것처럼 느껴질만큼 심각했다. 그 새벽에 산족 아이따마을에 사는 넬리아에게서 바나나와 고구마를 팔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난감했지만 교회로 오라고 연락을 하고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교민 단체카톡방에 구매요청을 올렸다. 그리고 빗 속에 프랜쉽 BDO은행 앞에 노점을 열었다.
우리나라의 추석과 같은 All Saint's Day 연휴로 거리는 한산하고 간혹 현금인출기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만 오갔다. 그때 건너편 참새떡방앗간 사장님이 오셔서 500페소 매상을 올려주시고 배달하러 간 조나피에게 꿀떡을 들려보내 주셨다. 그것을 기점으로 클락에서 직원을 보내 고구마와 바나나를 구입해 주신 분, 타지역 출타 중이시라며 생강 전부를 예약해 주신 분, 필리핀 부인과 자녀를 데리고 오셔서 바나나와 생강을 구입해 주신 분… 물건은 두 시간만에 동이 났다. 총 판매금액은 3200페소로 10만원이 채 안되는 금액이었지만 명절을 맞아 넬리아와 조나피 그리고 함께 온 조나피의 누나가 가족을 위해 쌀을 사고 음식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도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가족들을 위해 쌀도 사고 마음 따뜻한 명절을 보낼 것 같습니다.'라는 인사를 단체카톡에 남기고 노점을 정리했다. 그런데 교민 한분이 연락을 하셨다. 그리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하는 가족들, 필리핀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으시다며 한식당을 예약해주셨다. 그래서 11월의 첫날, 명절이지만 특별한 이벤트 없는 아이따 가족들과 아누나스행복한우리교회 식구들은 한인들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지인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우연히 타이어를 어디에서 구입하는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래서 시내 주행 위주라 중고타이어를 쓰는데 괜찮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근심어린 표정으로 타이어 만은 꼭 새 것을 써야한다는 주장을 해서 말문을 닫은 적이 있다. 왜 이 중고타이어 가게 꼬질한 의자에 앉아 있으면 꼭 그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걱정어린 조언에도 쌀 떨어졌으면 라면을 먹으면 되지라는 말과 같은 쨍그랑거림이 툭 떨어지는 느낌일까?
방금 도착한 카톡에는 내가 올린 식사대접에 대한 감사인사에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고생스러운 유년시절을 보냈던 사장님의 사연이 짤막하지만 무게감 있는 답장으로 단체톡에 올라와 있었다.
나는 이분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사장님이 올리신 카톡에 빨간 하트가 주렁주렁 달리는 것을 보니 사람들의 마음 속에 세상 사는 맛을 제대로 내신 것 같다
/이정은 필리핀 아누나스 행복한우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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