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족처럼 지내던 올란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심한 당뇨로 매주 두차례씩 투석을 하고 계셨다.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시신경도 훼손이 되어 부인 버지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바깥 나들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자녀들의 부탁으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마발라캇에서 두 분을 픽업하여 매주일 같이 예배를 드리면서 한 가족이 되었다.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장례식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염을 마치고 마치 살아계시는 분처럼 말끔하게 화장을 하고 필리핀 전통의상 바롱을 입혀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소담한 장례식장 앞쪽에 누워계시는 올란도 아버지 앞으로 옆에 놓인 국화를 한 송이를 옮겨놓는다. 옆에 놓인 걸개에는 고인의 성함과 가장 행복했을 순간 찍었을 사진 한 장을 커다랗게 걸어놓았다. 관 안에 다소곳이 누워계시는 분의 얼굴을 보니 투병 중에도 늘 주변사람들을 웃게 하셨던 순간들이 생각났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교회식구들과 장례식장에 갔던 날을 기억한다. 돌아가신 분을 앞에 모시고 문상객들마다 그 얼굴을 직접 확인하며 조의를 표하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나는 차마 돌아가신 분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어서 처음 몇해는 가족들과 인사만 나누고 돌아왔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한가지 문화적인 충격은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를 보내는 필리핀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잔치집처럼 밝고 시끌벅적했다. 가끔은 상주들과 눈시울을 적시는 분들이 있기도 했지만 이내 서로 웃으며 고인이 살아계셨을 때 이야기며 돌아가시던 순간들을 이야기 나누며 웃음소리가 식장안을 메웠다.
언젠가 가까운 필리핀 목사님과 한국의 장례식 문화를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 여쭤보았다.
한국의 장례식장 분위기는 돌아가신 분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픔이 크다, 그런데 필리핀은 다른 것 같다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다. 천국 하나님 품으로 갔는데 세상에서 병든 육체로 사는 것보다 기뻐할 일이 아니냐는 물음이 내게로 돌아왔다. 천주교가 국교인 필리핀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태어나서 묻히는 순간까지 존재하시는 분이다.
올란도 아버지의 장례는 3일장으로 치러졌다. 필리핀의 장례일정은 가족들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정해진다. 해외에서 일하는 가족들이 많아 때로는 일주일이나 그 이상의 기간을 기다렸다가 발인을 하는 경우도 보았다. 장지는 가족들이 사는 곳 인근 마발라캇 공원묘지로 준비되어 있었다. 맨 앞으로 고인을 모신 검정 리무진이 꽃으로 장식된 사진을 달고 출발했다. 그리고 그 뒤로 가족들과 친인척 그리고 친구들이 차량을 타고 느리게 이동했다. 일반적으로는 걸어서 장지까지 이동을 하는데 마치 과거 우리나라의 장례행렬을 연상하게 한다. 교통체증이 심한 마닐라에서는 이런 장례행렬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사는 팜팡가를 비롯한 중소도시에서는 아직도 심심치 않게 장례행렬을 볼 수 있다. 차가 이유없이 밀린다면 그 앞에 장례행렬때문인 경우가 많다. 발인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고인을 묘지에 안치시키면서 어머니 버지와 자녀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것을 보았다. 끝없이 이어지던 장례행렬에서 나온 인파가 가족들 주변으로 울타리처럼 둘러쌌다.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이자 아버지 올란도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필리핀의 11월2일은 돌아가신 분을 성묘하는 All Souls' Day(위령의 날)이다. 10월 말일부터 연휴가 시작되는데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서 돌아가신 부모님과 가족들을 찾아가 그 앞에 돗자리를 깔고 양초를 켜고 온 가족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소품을 즐긴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죽음은 또 다른 형태의 동반인 것 같다.
/이정은 필리핀 아누나스 행복한우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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