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선 이래로 잇따라 난파선 발굴
인천 앞바다서 '8세기경 선박' 발견
대양 오가기 좋은 첨저선 초기 형태
서남해안 특산품 황칠 운반 중 침몰
한국의 바다에서는 모두 14척의 고대 선박이 발견됐다. 대부분 고려 시대 선박이지만 인천 영흥도에서 발견된 영흥도선은 통일 신라 시대 선박으로 밝혀져 관심을 받고 있다. 아직 인천 영종도와 강화도 지역에서는 바닷속 고대 선박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마지막 남은 보물선을 품은 곳이 바로 인천 앞바다인 셈이다.
고려 시대에는 조운(漕運)이 발달하였다. 모든 조세를 현물로 거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조세는 곡창지대인 삼남지방에서 개경의 경창으로 운반되는데, 이때의 뱃길은 서해 연안을 따라 올라오는 길이었다. 하지만 연안 항해도 안전하지만은 않았다. 도처에 암초가 있고 조류의 변화에 따라 물살이 험악한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진도의 울돌목, 태안반도의 안흥량, 강화의 손돌목은 악명이 높았다. '배들의 무덤'으로 불린 이곳은 모든 조운선이 지나가야 하는 길목이어서 피해갈 수도 없었다. 아무리 노련한 어부들이라도 이곳을 지날 때는 언제나 긴장하기 마련이고 때로는 파도에 휩쓸려 난파되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1970년대 어부들의 그물에 하나둘 걸려 올라온 청자는 해저유물 발굴시대를 여는 기폭제가 되었다. 1976년 신안의 증도 앞바다에서 발굴된 신안선을 시작으로 진도, 십이동파도, 안좌도, 마도 등 서해 연안을 따라 10여척의 난파선이 발굴되었다. 이들 선박은 신안선을 제외하고 대부분 고려 시대의 선박으로 밝혀졌는데 바로 조세와 청자 등의 기물을 운반하다 난파된 배들이었다.
신안선은 발굴 당시부터 세계적인 관심사였다. 신안선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한·중·일의 항로를 운항하던 국제무역선이었다는 가설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즉, 중국 남부에서 출발해 한반도 강진 일대에서 중간 기착하여 고려청자를 싣고 일본으로 향하던 국제무역선이라는 설명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김병근 학술연구관도 “이제는 기존 학설에서 벗어나 한·중·일을 잇는 국제무역선으로서의 신안선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태안반도 지역에서 발굴된 난파선에서는 2만여 점의 청자가 발굴되었다. 태안반도 일대에서 많은 수중문화재가 발굴된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진호신 연구관은 “이곳 태안의 마도 일대는 고려와 조선의 중요한 조운로였기에 고대 선박과 수만 점의 수중유물이 쏟아져 나온 곳”이라고 설명했다. 기물들은 곡물과는 달리 갯벌 속에서 그 형태가 잘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청자가 발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수중 발굴된 유물 중에는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도 상당수 있다. 그중에서도 뛰어난 5점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인천 앞바다에서도 2013년과 2014년에 걸쳐 영흥도선에 대한 수중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영흥도선은 발굴 결과 8세기 통일 신라 시대의 배로 확인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40여 년의 수중발굴사상 가장 오래된 시기의 배인 것이다. 영흥도선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배의 형태가 특이함에 있다. 이제까지 발굴된 배들은 국제무역선인 신안선을 제외한 나머지 배들 모두 선박의 바닥이 평평한 모양을 한 평저선(平底船)이다. 연안의 얕은 곳을 운행하기에 편리하게 만든 것이다. 신안선은 밑바닥이 뾰족한 첨저선(尖低船)인데 이는 대양을 오가며 국제무역을 하는데 안전성과 편리함을 도모한 것이다. 그런데 영흥도선은 이러한 평저선과 첨저선의 중간 형태를 띠고 있다.
인류는 고대로부터 배를 만들어 사용했다. 배의 운항은 강과 바다의 연안에서부터 차츰 먼 바다로 나아갔다. 인류는 단계마다 효율적이고 필요한 배를 만들었다. 이때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이 배의 바닥이었다. 배를 운항하는 지형의 형태에 따라 배의 모습도 다르게 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백제는 삼국 시대에 가장 해양을 중시한 국가다. 백제라는 국명이 '백가제해(百家濟海)'에서 비롯되었듯이 황해를 주도한 해양국가다. 따라서 삼국 중 먼저 황해연안항로를 장악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백제 선박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서 알기 어렵지만 통일 신라 시대로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백제와 고구려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더욱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구축할 수 있는 기반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가 된 후, 황해와 동중국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한·중·일을 잇는 해상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러한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해상왕국을 운영하려면 선박과 항해에서도 선진적인 기술을 갖춰야만 가능하다. 일본의 승려 엔닌도 장보고의 은혜를 입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장보고가 동아시아 네트워크를 운영한 선단의 배들은 어떤 형태였을까.
'(840년) 대재부(大宰府)에서 말하기를 “대마도 장관이 먼바다의 일은 바람과 파도가 위험하고 연중 바치는 조물과 네 번 올리는 공문은 자주 표류하거나 바다에 빠진다”고 이릅니다. 전해 듣건대 신라선은 능히 파도를 헤치고 갈 수 있다고 하니, 바라건대 신라선 6척 중에서 1척을 나누어 주십시오.' <속 일본서기>
장보고 선단의 배는 대양을 항해하기 좋은 첨저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흥도선은 장보고가 활약하던 시기인 통일 신라 시대에 제작된 것이다. 영흥도선의 형태는 첨저선으로 발달하는 초창기로 준첨저선에 해당하는데, 장보고 선단은 바로 이러한 선단으로 황해를 오가며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영흥도선이 국제무역선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배에서 발견된 유물에서도 알 수 있다. 유물 중에는 황칠이 있었는데, 이는 한반도 서남해안 완도, 보길도 등지에서만 자생하는 황칠나무에서 채취한 도료이다. 황칠은 황금빛을 띠며 내구성이 뛰어난 최고의 도료로 널리 알려졌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황제의 갑옷에 사용되던 귀한 교역품이다. 영흥도선은 배의 형태뿐 아니라 선적된 물품에서도 국제무역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흥도선의 발견은 고대 인천 앞바다의 국제항로를 연구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영흥도선이 발견된 지점은 자월도와 영흥도의 사이다. 이 해역은 서긍의 사절단이 지나간 항로이기도 하다. 또한 부근의 이작도 앞바다에서도 많은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비춰볼 때, 덕적도와 이작도 사이를 지나 자월도와 영종도 사이를 거쳐 가는 항로가 고대로부터 국제항로로 이용되었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에 묘사된 고려선박
사신 접대·순찰용 선박…서긍, 상세한 기록 남겨
서긍의 송나라 사신단은 당시로써는 가장 큰 선박인 신주(神舟)를 새로이 건조해 고려를 방문했다. 신주를 앞세워 고려에 위엄을 보이기 위함이다.
서긍은 흑산도부터 벽란도까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올라오면서 고려의 선박에 대해서도 고려도경에 자세히 기록했다. 그가 기록한 고려의 선박은 송방과 막선, 관선, 순선 등 모두 4척으로 주로 사신 접대와 순찰을 위한 선박들이다. 고려의 국제항구인 벽란도에 수많은 국제무역선과 거대한 군선이 있었음에도 전혀 기록에 담지 않았다.
먼저 송의 사신단을 맞이하기 위해 군산도까지 내려온 김부식 일행이 타온 배가 송방(松舫)이다. 서긍의 표현에 따르면 배의 앞뒤가 직선으로 생겼다고 했다. 이는 선수와 선미가 뾰족하지 않고 사각형 모양의 뭉툭한 모습을 한 전통적인 한선의 모습을 묘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갑판 가운데에 지붕이 있는 선실 다섯 칸이 있는데 이중 외부로 트여 있는 선실 두 칸에는 비단 보료가 깔려있는데 가장 화려하다고 표현했다. 아마 이곳이 사신단을 접대하는 장소로 보인다.
사신단을 맞이하러 나온 고려의 김부식을 비롯한 고급 관료인 정사와 부사, 상절(上節)만이 탔다고 기록했다. 한마디로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마련된 전용선인 것이다.
막선(幕船)도 송방과 마찬가지로 사신영접용 선박으로 중간 관리인 중하절(中下節)을 태웠다 기록되어 있다.
막선이란 막(幕)을 둘러친 배를 일컫는데, 푸른 포(布)로 지붕을 삼고 아래는 장대로 기둥을 대신하고 네 귀퉁이는 각각 채색 끈으로 매었다고 했는데 이는 고려선의 특징인 가룡과 멍에(횡방향 강도를 높이기 위해 선박 양측 외판을 통나무로 연결하는 방식)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일반 관료들이 타고 온 배는 관선(官船)이라 불렀는데 고려와 조선까지 사용하던 대표적인 한국의 전통선박 모습과 일치했다.
고려도경에는 관선에 대해 선박 갑판 위에 지붕과 문이 있는 선실이 있고 뱃전 주위로는 선원들의 안전을 위해 난간을 둘렀다고 기록했다. 또 선박 양쪽 외판을 나무로 서로 꿰뚫어 고정했는데 이는 한선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멍에(선박 양측을 횡으로 고정한 목재)를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멍에를 배 밖으로까지 연장해 그 위에 시렁을 얹으면 배의 상판이 저판보다 넓어지는데 이는 전형적인 한선의 특징이기도 하다.
특히 중국 선박에서 주로 사용하는 격벽(선체의 내부를 몇 개의 구획으로 나누는 간막이벽) 대신 선체의 좌우 외판을 통나무로 연결해 횡방향 강도를 높이는 한선 고유의 방식인 가룡(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이물(선수)에는 호롱(돛을 끌어올리는 둥근 장치)이 있고 뱃집 위에는 돛대를 세워 포로 돛 20폭을 드리웠다고 묘사했다.
마지막으로 수군이 해상 순찰을 돌 때 사용하던 순선(巡船)은 문헌에 의하면 돛대가 하나고 배 위에 선실이 없으며, 노와 치가 있는 것으로 묘사됐다. 따라서 순선은 가까운 바다만 운행하던 순찰선으로 보인다.
/인천일보 신고려도경 특별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이재민 기자 leejm@incheonilbo.com
허우범 교수 appolo21@hanmail.net
신춘호 박사 docu8888@daum.net
설재욱 대표 media_29@naver.com
※ 이 기사는 2022년도 인천광역시 지역언론지원사업으로 시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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