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월주요·관요·용천요 등 인기
고려, 건국 직후 송과 활발한 교류
청명상하도 고려인 높은 신분 나타나
고려청자, 송 사신 서긍도 극찬
12세기 '상감청자' 세계 최고 수준
송 수중금서 '비색 천하제일' 꼽아
해상실크로드 따라 유럽까지 번져
인류가 처음 만든 토기는 약해서 부서지기 일쑤였다. 오랜 시대를 거치며 토기는 고온에서 구워야만 튼튼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기술과 문명이 발전하자 문화수준을 반영한 자기(瓷器)가 탄생하였다. 자기는 푸른색의 유약을 바른 청자로 발전한다. 청자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졌지만 공급은 한정적이었다. 청자의 수급이 원활해졌다고 생각되면 새로운 기술의 청자들이 등장하였다. 향로와 베개는 물론 피리와 장고에 이르기까지 청자의 변신은 끝이 없었다. 청자는 생활도구를 넘어 다방면에서 문화를 향유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된 것이다. 청자의 인기는 해상실크로드를 타고 인도양과 지중해를 건너 유럽까지 번졌다. 동아시아에서 출발하는 해상실크로드는 일명 '도자기의 길(陶瓷之路)'이라고 할 정도였다.
청자는 12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 동아시아는 송과 고려가 황해를 마주보고 있었다. 송은 선진적인 기술로 우수한 청자를 만들었다. 월주요(越州窯), 관요(官窯), 용천요(龍泉窯) 등에서 빚은 청자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인기가 높았다. 남송의 휘종은 아예 황제가 쓰는 그릇을 모두 청자로 바꿨다. 이에 귀족들도 청자를 애호하자 청자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송은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이에 따라 국가 경제도 부강해졌다. 고려는 건국과 함께 송과 통교하였다. 송과 고려의 상인들은 황해를 오가며 교역하였고, 양국의 사신도 황해를 오가며 친선교류를 이어갔다. 고려는 개방정책을 펼치며 송에 많은 학생과 승려를 보내 선진문물을 익혔다.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는 1120년 송의 수도인 카이펑(開封)의 청명절 풍경을 묘사한 중국의 국보다. 이 그림에는 당시 송의 풍요로운 경제 상황과 해상무역 활동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맨 왼쪽에는 검은색 갓(黑笠)을 쓰고 백마를 타고 가는 고려인이 보인다. 이 고려인은 어떤 신분이었을까.
이 그림이 완성된 3년 후인 1123년, 송의 관리인 서긍은 사절단으로 고려를 방문하였다. 그가 남긴 '고려도경'에는 '청명상하도'의 고려인이 어떤 신분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국상(國相)이 행차 때에는 급사라는 천인이 수십 보 앞에서 청개를 들고 서고, 다음에 정리가 앞장을 선다. 국상이 타는 말은 두 사람이 고삐를 잡는다. 국상 뒤에는 행차에 딸린 물건들을 지고 가는 급사들이 뒤따른다'고 기록하였다.
그림 속의 고려인은 두 명이 말고삐를 잡고 있다. 정리들이 앞장서고 그 앞에 청개를 든 급사가 있다. 짐을 지고 뒤따르는 급사도 두 명이 보인다. 서긍의 기록을 참고하면 청명상하도의 고려인은 국상급의 관리이거나 왕족과 같은 높은 신분이다. 고려와 송의 인적교류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음을 '청명상하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서긍은 고려를 다녀가면서 세밀하게 관찰하고 그림까지 그려가며 많은 정보를 수집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데 여러 기록에서 고려의 후진성을 논하고 있다. 송의 문화와 문물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황제에게 보고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회성 견학에 따른 단편적인 생각은 그의 기록 곳곳에 보인다. 그리하여 고려의 병기에 대하여 평가하길, '고려는 그 병기가 매우 간단하고 성긴 것이 견고하지 못하여 맨손으로 치는 것과 같다'고 폄훼하였다.
서긍이 고려를 방문할 당시의 송은 거란이 세운 요(遼)의 공격으로 국운이 위태로울 때였다. 고려는 이미 요와 세 차례 전쟁을 치르며 이를 모두 잘 방어하였다. 그러자 요가 고려를 함부로 얕잡아 보지 못하는 실정이 되었다. 송은 이러한 고려와 동맹을 맺어 요를 협공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에 송은 고려와의 동맹을 성사시키기 위해 거대한 신주(神舟)까지 만들어가며 고려에 대대적인 사절단을 보냈던 것이다. 만약 고려의 병기가 서긍이 기록한 대로 견고하지 못하고 맨손으로 싸우는 것과 같다면 어찌 요와의 전쟁을 이겨낼 수 있었겠는가. 고려보다 월등한 병기를 갖췄다고 자부한 송은 얼마 후 금에게 패해 두 황제는 포로가 되고 항저우(杭州)로 쫓겨났다. 역사는 송의 허울뿐인 위세가 망국으로 치달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서긍은 또 여러 분야에서 고려의 기술이 송에 미치지 못함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서긍도 고려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곧 '비색(翡色)'을 내뿜는 청자였다. 특히, 사자 모양의 향로인 산예출향(狻猊出香)에 흠뻑 매료되었다. 12세기에 이르면 고려의 청자 생산기술은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다. 자기 위에 그림을 그려 넣은 '상감청자(象嵌靑瓷)'는 중국의 기술을 뛰어넘어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였다. 이런 까닭에 고려청자는 특유의 비색과 상감 양식을 인정받아 중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인기 높은 고려만의 특산품이 되었다. 이는 마치 오늘날의 첨단반도체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남송 시대의 태평노인이 지은 '수중금(袖中錦)'에는 세상에서 최고인 것만을 모은 '천하제일'편이 있다. 낙양의 꽃, 건주의 차, 촉의 비단 등과 함께 고려청자의 비색을 천하제일로 꼽았다. 도자기의 종주국인 송나라는 월주요, 용천요 등에서 뛰어난 청자를 생산하였다. 그럼에도 고려청자가 종주국의 청자들을 제치고 당당히 '천하제일'에 오른 것은 고려의 도공들이 빚은 비색청자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려청자는 개경을 중심으로 제작되다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청자의 성공여부는 질 좋은 흙을 재료로 사용하는데 있다. 결국, 좋은 흙이 집중된 호남지역이 비색청자의 주생산지가 되었는데, 강진과 부안이 대표적인 곳이다. 인천 서구 검안동은 초기 녹청자의 제작지로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11세기 초에 녹갈색의 유약을 사용하여 일상용품으로 사용하는 가벼운 청자들을 제작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비색청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고려의 도공들은 녹청자를 제작한 지 1세기만에 가장 순수한, 그리하여 하늘이 내려준 색인 '비색'을 완성하였다. 게다가 '상감(象嵌)'이라는 최신기술까지 장착하여 당대 동서양을 주름잡으며 전 세계가 '코리아(KOREA)'를 외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인천일보 신고려도경 특별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이재민 기자 leejm@incheonilbo.com
허우범 교수 appolo21@hanmail.net
신춘호 박사 docu8888@daum.net
설재욱 대표 media_29@naver.com
※이 기사는 2022년도 인천광역시 지역언론지원사업으로 시행한 것입니다.
고려청자, 전 세계에 코리아를 알린 일등공신
하늘의 재주를 빌려다 놓은 솜씨…맑고 청명한 비색
12세기부터 두각을 나타낸 고려청자는 비색의 순수함으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또한, 이를 더욱 발전시켜 세련되고 품격 높은 상감청자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고려의 청자가 천하제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중국의 청자는 진한 색에 유약이 불투명하여 장중한 맛을 지닌다. 하지만 고려의 청자는 맑고 청명한 비색을 바탕으로 유려한 선과 생동감 넘치는 모양, 기물과 일치를 이루는 상감문양의 회화적 표현이 뛰어났다. 이는 중국청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고려만의 최첨단 기술력이 응집된 것이기에 천하제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의 문인이자 학자인 이규보는 계양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의 청자를 칭송하는 시는 12세기 최전성기 비색청자의 우수성을 제작과정과 함께 잘 표현하였다.
푸른 자기로 술잔을 구워 (陶出綠甆杯)
열 중 뛰어난 하나를 골랐구나 (揀選十取一)
선명한 푸른 옥 빛 (瑩然碧玉光)
매연 속에 파묻히길 몇 번이던가 (幾被靑煤沒)
영롱한 것은 수정처럼 맑고 (玲瓏肖水精)
단단한 것은 바위와 맞먹네 (堅硬敵山骨)
내 이제야 알겠네, 술잔 만든 솜씨 (迺知埏塡功)
하늘의 재주를 빌려다 놓은 것을 (似借天工術)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