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반도 마도 출발 송 사절단 일행
대형선 '신주' 타고 9시간 동안 항해
영흥도 -팔미도 지나 영종도서 정박
창장 무협과 닮은 '급수문'은 손돌목
'합굴'의 위치는 용당돈대 부근 유력
연미정 일대 '분수령'서 채선 갈아타
900년 전, 고려와 송은 황해를 오가며 친밀한 통교를 하였다. 송은 고려와의 동맹을 추진하기 위하여 특별히 '신주(神舟)'라는 거대한 배까지 만들어가며 고려에 사절단을 보냈다. 인원도 700명에 달하는 대규모였다. 송의 사절단은 닝보를 출발한 지 5일 만에 황해를 건너 고려의 영해로 들어왔다.
고려는 송의 사절단을 환영하고 연안을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 시작이 흑산도였다. 지금도 흑산도 산마루에는 봉화를 올린 터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시작된 봉홧불은 섬과 해안가에 설치된 봉화대와 차례로 호응하며 서긍 일행이 탄 신주를 고려의 개경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였다.
서긍 일행은 변산반도 앞의 죽도와 위도를 지나서 군산도(현 선유도)에 처음으로 정박하였다. 고려에서는 동접반(同接伴) 김부식이 이들을 영접하고 망주봉 아래에 있는 군산정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군산정에서 식수를 보급 받은 사절단은 태안반도를 따라 올라와 마도의 안흥정, 영종도의 경원정을 거쳐 개경의 벽란도에 도착하였다.
태안반도 마도의 안흥정을 출발한 송 사절단은 어느 항로로 벽란도에 도착하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정리되지 않았다. 탐사팀은 서긍의 기록과 현장탐사를 통해 이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서긍 일행은 아침 7시에 마도를 출발하여 구두산, 당인도, 쌍녀초와 대청서를 거쳐 오후 2시경에 화상도에 도달한다. 대략 7시간의 항해를 한 것이다. 이후 우심서와 섭공서 및 소청서를 거쳐 오후 4시경 자연도에 정박하였다. 현재 섭공서(팔미도)와 소청서(월미도), 그리고 자연도(영종도)는 의견이 모아졌다. 이를 참고하면 태안반도의 마도에서 영종도로 오는 항로는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덕적도와 이작도 사이를 거쳐 자월도를 지나가는 현재의 인천-제주항로이고, 둘째는 이작도와 풍도 사이를 통과하여 자월도와 영흥도 사이를 지나가는 항로가 그것이다.
서긍의 기록에서 두 항로를 가르는 기준점을 찾는다면 대청서(大靑嶼)이다. 현재 대청서는 대부도와 문갑도, 풍도라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서긍은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을 몇 가지로 구분하였다. 서(嶼)는 작은 섬을 말한다. 영흥도와 대부도 사이의 뱃길은 수심이 얕고 갯벌지대여서 신주 같은 커다란 첨저선단이 항해하기에는 부적합한 항로다. 또한 대부도는 큰 섬이다. 따라서 대부도는 대청서로 보기 어려우며 이후 항로에 나타난 섬들과의 연계성도 맞지 않는 것이 많다.
문갑도와 풍도는 모두 작은 섬이다. 그런데 문갑도 주변의 항로에는 덕적도와 대·소이작도, 자월도 등이 있다. 이를 서긍의 기록과 순차적으로 비교하면 육지와 가깝다는 우심서의 위치가 부합되지 않는다. 반면에 풍도가 대청서라면 서긍의 항로는 자월도와 영흥도 사이를 지나가게 되는데 영흥도 건너편의 구봉도는 서긍이 기록한 대로 육지와 가깝고 주발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 모양의 섬이다. 따라서 화상도는 영흥도, 우심서는 구봉도로 보아야 한다.
이를 종합하면 서긍 일행은 태안반도 마도에서 풍도와 영흥도, 팔미도와 월미도를 지나는 항로로 영종도에 정박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영종도에서 개성의 벽란도에 이르는 고대 항로는 강화도를 중심으로 좌우의 바닷길이다. 즉, 염하수로를 따라 올라가는 것과, 석모도와의 사이 길을 따라 가는 것으로 구분된다. 서긍 일행은 경원정을 출발하여 급수문, 합굴, 분수령을 거쳐 예성강을 올라가 벽란도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서긍이 간 항로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당도한 급수문(急水門)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급수문에 이르는 길을 '바다에 있는 섬 같지 않고 흡사 무협(巫峽)을 지나는 강길 같다.'고 하였다. '산이 둘러싸고 굴곡을 이루면서 앞뒤로 이어졌는데, 그 양쪽 사이가 물길'이라고도 하였다. 물살이 급한 곳이어서 돛을 펼치지 않고 오직 노를 저어가며 밀물을 타고 올라간다고 하였다.
무협은 중국의 창장(長江) 삼협(三峽) 중 하나로 강물이 깊은 협곡들 사이로 흐르는 구간을 말한다. 서긍이 무협에 비교한 항로는 강화도 동쪽의 염하수로를 말한 것이다. 이곳의 광성보 손돌목은 현재도 물길이 거셀 뿐만 아니라 밀물 때면 바닷물이 올라와 요동치는 곳이다.
서긍의 항로가 이곳으로 지나갔음은 합굴의 위치에서도 알 수 있다. 최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는 염하수로를 답사하여 용당돈대 아래에서 합굴로 여겨지는 곳을 찾았다. 서긍은 합굴이 있는 산등성이에는 뱃사람들이 바다에 제사를 지내는 용사(龍祠)가 있다고 하였는데, 탐사팀은 합굴 현장에는 용사터로 보이는 곳을 직접 확인하였다. 돈대의 이름이 용당(龍堂)인 것도 용사가 있던 곳에서 비롯된 지명임을 짐작할 수 있다.
분수령은 두 산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작은 바다가 나뉘는 곳이라고 하였다. 염하수로에서 예성강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러한 지리를 찾아보면 갑곶돈대 일대가 유력하다. 이곳은 문수산과 당산이 마주보고 있는 곳으로 고려시대부터 나루터가 있었다. 강화해협을 지나는 주요한 길목이기도 하여 진해루(鎭海樓)라는 문루도 있었다.
서긍은 분수령에서 예성강으로 들어가기 전에 용골에 정박하였다. 용골은 송의 사절단이 타고 온 2척의 신주와 6척의 객주가 최종적으로 머문 곳이다. 이곳에서부터 벽란도까지는 채선(彩船)을 타고 갔다. 사절단의 선박이 커서 예성강으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용골은 커다란 선박들이 정박하기 좋은 곳이어야만 한다. 월곶리의 연미정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조운선들이 조수(潮水)에 맞춰 예성강과 한강을 오르기 위해 대기하던 곳이다. 서긍의 사절단도 조수에 맞춰 예성강을 따라 벽란도로 향했다. 따라서 서긍 일행이 정박했던 용골은 강화도의 연미정 일대로 볼 수 있다.
/인천일보 신고려도경 특별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이재민 기자 leejm@incheonilbo.com
허우범 교수 appolo21@hanmail.net
신춘호 박사 docu8888@daum.net
설재욱 대표 media_29@naver.com
'동방예의지국' 고려의 품격
1만 군졸 호위·5일에 한 번 연회…송 사절단 극진한 대접
서긍 일행은 닝보를 출발한 지 14일 만에 개성의 벽란도에 도착하였다. 고려는 송이 고려인의 방문을 환영했던 것 못지않게 송 사절단을 극진하게 맞이하였다. 사절단이 조서를 받들고 고려 왕궁으로 갈 때에는 의장대인 신기대를 필두로 1만명의 군졸이 사절단을 에워싸고 행진하였다. 또한 사절단에게 5일에 한 번씩 연회를 열어 환대하였다.
사절단이 귀로에 오르기 전에도 국상(國相)을 보내어 주연을 베풀었고, 접반관(接伴官)과 송반관(送伴官)은 사절단이 고려의 영해에 들어올 때부터 돌아갈 때까지 그들을 영접하였다. 서긍은 고려의 접반관과 송반관의 예우에 대하여 '(우리 일행을) 군산도에서 영접하고 (귀국할 때에도 군산도까지 함께 와서) 전송하는데, 신주(神舟)가 큰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나서야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고 감사히 여겼다. 동방예의지국으로서의 고려의 면모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고려와 송은 황해사단항로를 통해 교류를 이어갔다. 사단항로는 연안항로나 횡단항로보다 진일보한 항로다. 이러한 항로를 개발하는 것은 선박의 건조술과 항해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려운 것이다. 사단항로는 송이 요, 금 세력에 밀려 항저우로 수도를 옮겨 남송시대를 열어가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고려와 송은 수시로 변하는 정세 속에서도 끊임없이 사단항로를 오갔다. 교역량도 늘었고 문물교류도 많았다. 양국의 교류는 문화국가로 발전하는데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특히, 송이 항저우로 후퇴하여 국가체제를 재정비할 때에 고려에게 수많은 서적을 요청하였다. 고려는 이를 신속하게 처리해주어 남송시대를 빠르게 안정시킬 수 있도록 해주었다.
※ 이 기사는 2022년도 인천광역시 지역언론지원사업으로 시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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