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간 한선 복원 통신사선 활용
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서 출발
흑산도-홍도-부남군도-위도 '경유'
선유도 도착…양국 교류 역사 재조명

 


 

지난 6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학계와 관계기관의 전문가들과 함께 900여 년 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년)의 국내 해상 항로를 탐사했다.

신고려도경 특별취재팀도 탐사단 여정을 동행 취재했다. 서긍이 1123년에 고려를 견문하고 이듬해 편찬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하, 고려도경)의 국내 항로를 규명하는 것이 이번 탐사의 주요 목적이다. 6월20일부터 23일까지 약 2박 3일간 이어진 탐사에는 전통 한선의 원형을 복원한 조선통신사선이 탐사선으로 활용되었다. 중국 사신 서긍의 항로 탐사에 한일 교류의 상징인 복원 통신사선을 활용하는 것은 전통 시대 바다를 통한 대외교류 역사를 재조명하는 데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요 항로는 목포를 출발해 흑산도와 홍도, 부남군도, 위도, 선유도를 돌아오는 여정이다.

탐사단 단장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진호신 학예연구관은 “서긍 고려 방문 900주년을 앞두고 황해의 고대 항로 원형을 탐색하는 의미가 있고, 무엇보다도 2022년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는 해에 한중 교류의 직접적인 현장을 찾아봄으로써 양국 간 교류 역사를 재조명하는 의미도 있다”며 이번 탐사의 의미를 설명했다.

 

 

#. 탐사 1일째. 흑산도로 향하다

▲ 탐사 1일째-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출항하는 통신사선.
▲ 탐사 1일째-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출항하는 통신사선.

06:40 육지의 날씨가 쾌청하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전시관 뒤편의 선착장에 도착하니 복원된 전통 한선들 사이로 통신사선이 보인다.

 

07:00 탐사단원들이 선착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번 탐사단의 총괄 책임을 맡은 진호신 연구관과 통신사선의 운항을 총괄하고 있는 홍순재 연구관을 비롯하여 선장과 갑판장, 항해사 등 탐사선 운항을 책임질 대원들이 속속 들어왔다. 이내 출항 준비로 통신사선 선내가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07:30 탐사단 상견례가 있었다. 진호신 연구관의 인사로 시작된 상견례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각 소속팀별 소개로 이어졌다. 부산 국립해양박물관에서는 김태만 관장을 비롯한 2명의 학예사가 참여했고, 민속학자로 저명한 이윤선 박사(서남해안포럼이사장)도 합류했다. 특히 인천일보 특별취재팀과 OBS 다큐제작팀 등 언론매체도 동행했다.

 

08:30 출항한 지 1시간이 흘렀다. 탐사선은 이미 목포 밖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서긍 일행은 '남풍을 받아 순조로운 항해를 이어가다 서남풍을 받자 돛을 올려 속도를 높이며 나아갔다'고 했다. 명주를 출발하여 사흘 만에 가거도와 흑산도를 지나고, 다시 사흘 만에 군산도에 다다랐다고 했으니, 해풍을 이용한 항해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겠다. 마음 같아서는 복원된 통신사선의 돛을 우아하게 펼쳐 나아가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8∼10노트의 동력으로 가고 있었다.

갑자기 섬들이 탐사선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더니 순간 보이지 않는다. 주변으로 해무(海霧)가 몰려왔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시계는 약 10~30m 정도와 '시계 제로'의 위험한 상황이 오락가락한다.

서긍이 고려 경내인 협계산(가거도) 일대를 지나던 6월1일을 전후해서 안개가 자욱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음력으로 비슷한 시기에 탐사선을 띄운 셈이니 기상 상태도 비슷한 느낌이다. 시계가 불안하니 항해사, 선장, 승조원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서남해 연안의 바다에 설치된 양식장과 각종 어망, 부표 등이 항해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탐사선이 어구에 걸리지 않도록 홍순재 연구관과 선장, 항해사의 교감이 무전기 너머로 분주하게 들린다.

 

▲ 탐사 1일째-흑산도항으로 입항하는 통신사선.
▲ 탐사 1일째-흑산도항으로 입항하는 통신사선.

15:00 해무 사이로 검은 물체가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서서히 실체가 드러난다. 흑산도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연신 해무 속을 누비다가 흑산도에 이르러서야 서서히 사위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해무와 구름에 덮인 흑산도의 원경이 신비한 듯 아름답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섬의 모습과는 달리 흑산도의 이미지는 유배인의 섬이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암울함에 가깝다.

어쨌든 정약전(丁若銓, 1758~1816년)이 유배 온 섬이라는 생각이 미칠 즈음, 탐사선은 이내 흑산도항 바깥에 도착했다.

 

15:20 서긍의 고려도경에서 언급한 흑산도 근처 '백산'이 어느 섬인가에 대한 학계의 이견이 분분한 만큼 백산을 확인하기 위해 탐사선을 대장도 방향으로 운항하기로 한다. 대장도는 홍도와 더불어 백산으로 지목되는 곳이다. 하지만 대장도로 가던 중 급히 흑산도항으로 피항하기로 했다. 짙은 해무로 더 이상의 항해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내일의 탐사를 기대해보기로 했다. 흑산도항으로 들어가는 길에 '흑산'을 묘사한 서긍의 고려도경을 확인하며 선상토론이 벌어졌다.

흑산에 대한 서긍의 기록은 오늘날 흑산도의 그것과 대체로 부합된다는 점에서 이견이 없다. 흑산도 진리 2구(읍동) 마을에는 사신단의 객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지가 발굴되었고, 인근 사찰 무심사와 반월성, 상라산성의 봉화도 여러 문헌 기록과 발굴을 통해 밝혀진 바 있기 때문이다. 서긍은 흑산도에서 머물지 않고 신시(오후 3시30분~4시 30분무렵) 후에 지나갔다고 했다. 탐사단은 흑산도항에 들어가 정박했다. '장판'처럼 잔잔한 바다와 짙은 해무로 바다의 일면을 경험한 하루였다.

 

 

#. 탐사 2일째. '백산'은 홍도일까, 장도일까

▲ 탐사 2일째-해무에 가려진 홍도의 모습.
▲ 탐사 2일째-해무에 가려진 홍도의 모습.

04:30 칠흑 같은 어둠 사이로 탐사선으로 탐사단원들이 모여들었다. 승선 인원 체크를 마친 탐사선은 5시가 되자 어김없이 흑산도항을 빠져나간다. 탐사선 선상 누각에 삼삼오오 모여 먼바다를 바라본다. 어제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백산'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06:30 흑산도 북부에서 장도(대장도, 소장도) 사이의 항로를 따라 서남쪽으로 항해한다. 서긍이 '백산'이라고 묘사했던 흔적을 찾기 위해 전문가들은 '고려도경' 책을 펼쳐 들고 기록을 살피거나 삼삼오오 의견을 나눈다.

“6월3일 오시 후에 동북쪽으로 산 하나를 보았다. 성(城)에 담장이 둘러쳐진 것처럼 매우 컸는데, 햇빛 비치는 곳은 옥처럼 희었다. 오후 3시가 다 되어 바람이 불어 배의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고려도경 권35, 해도2, 백산>

탐사에 함께한 전문가들도 의견이 분분하다. 햇볕에 반사되는 암석의 모양이나 흑산도와의 거리, 방위, 조류, 주변 경관 묘사 등을 고려해 대장도일 것으로 추정하는 설, 기존의 홍도설을 재차 확인하는 입장 등이 설왕설래했다. 이번 탐사에서도 해무가 짙게 끼어 백산을 명확하게 비정하는 결론은 내지 못했다. 의견이 분분하던 사이 어느덧 탐사선은 홍도 서쪽 외곽 항로를 따라 동북쪽으로 항로를 잡고 있었다. 열띤 선상토론에 홀려 홍도의 비경을 많이 놓쳤다.

 

07:20 위도와 군산도 방향으로 항해가 본격 시작됐다. 이번 탐사의 항로를 분석하고 기록하는 강원춘 학예사로부터도 흑산도 이후의 서긍 항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12:30 탐사선이 부남군도를 지난다. 망망대해와 간간히 보이는 크고 작은 섬들을 지도와 맞춰보는 등 '지문항해(地文航海)'를 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비빔밥형 전투식량으로 한 끼 해결한다.

 

▲ 탐사 2일째-서긍이 정박했던 죽도가 있는 안마도.
▲ 탐사 2일째-서긍이 정박했던 죽도가 있는 안마도.

15:50 안마도를 지났다. 서긍 일행이 6월4일에 정박했다는 죽도(竹島)가 있는 섬이다.

“산 앞에 흰 돌로 이루어진 암초가 수백 덩어리 있는데, 크기가 모두 다르고 마치 옥을 쌓아 놓은 것 같았다.”<고려도경 권36, 해도3, 죽도>

지금도 죽도 앞바다에는 기암괴석, 암초들이 널려있어 서긍의 묘사한 정경과 흡사함을 느낄 수 있다. 서긍 일행은 귀로에 다시 죽도를 지나게 되는데, 마침 추석 달이 돋아 올랐기로 선원들과 춤과 술과 노래로 객수를 달래기도 했던 곳이다.

 

▲ 탐사 2일째-위도항에 정박한 통신사선.
▲ 탐사 2일째-위도항에 정박한 통신사선.

18:00 멀리 고섬섬이 시야에 들어 온다. 부안군 위도(蝟島)를 말한다. 고려에서 고슴도치의 털을 고섬섬이라고 하는데, 이 섬의 나무들은 무성하되 잘 크지 않아 고슴도치의 털 같았기에 불려진 이름이다. 서긍 일행은 섬에 정박하여 고려인들이 제공하는 물(식수)을 얻고 쌀로 사례했다고 기록하였다. 위도 치도리에 오래된 우물이 남아있어 개연성이 높다.

 

19:40 석양이 내릴 무렵에서야 인근 위도항에 입항하여 정박하였다. 오늘은 선상 숙박의 경험을 하게 됐다.

 

 

#. 탐사 3일째. 고려 접반사 김부식, 서긍 일행을 맞이하다.

▲ 탐사 3일째-선유도를 떠나 회항하는 통신사선.
▲ 탐사 3일째-선유도를 떠나 회항하는 통신사선.

06:00 동이 트는 시각에 탐사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번 탐사의 마지막 탐사지인 군산도로 향한다. 군산도는 지금의 선유도를 말한다. 군산도에는 고려 시대 군산정, 숭산행궁, 오룡묘, 자복사 등 건물이 있었다. 1123년 6월6일 아침 일찍 위도를 출발한 서긍 일행은 오전 8시쯤에 군산도에 정박했다. 군산도는 고려 조정에서 파견된 접반사가 송 사신 일행을 공식적으로 맞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당시 접반사는 삼국사기로 유명한 김부식(金富軾,1075~1151년)이었다.

 

07:00 고군산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서쪽에 위치한 관리도의 서쪽 항로를 이용하여 고군산의 섬들을 크게 돌아 선유도로 접근했다. 탐사선은 선유도 선착장 인근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양식장의 어구와 얕은 수심, 암초들로 인해 진입이 불가했다. 멀리 눈에 들어오는 선유도 망주봉을 뒤로하고 안전한 항로를 찾기 위해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이번 탐사의 최종 목적지인 군산도(선유도) 탐사는 이렇게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고 마무리되었다.

 

07:10 탐사선은 곧장 목포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회항을 시작했다. 쉼 없이 항해해야 해 떨어지기 전에 당도할 수 있으니, 일정이 꽤나 벅차다. 선유도를 되돌아 장자도와 관자도 사이를 지나 남서쪽으로 운항하기 시작했다. 목포로 회항하는 바다도 역시 '장판'이다.

 

16:20 탐사선이 증도 연안을 타고 남쪽으로 항해하고 있을 즈음, 홍순재 연구관이 멀리 신안 증도 앞바다를 가리킨다. 신안선 발굴 해역이라고 설명한다. 신안선 발굴은 국내 '수중고고학' 분야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정도로 해양유물 발굴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알려지고 있다. 홍 연구관의 신안선 발굴 스토리를 경청하는 가운데, 탐사선은 천사대교 아래를 지나 목포 삼학도 앞바다로 진입하고 있었다.

 

17:30 서긍 항로 탐사를 마친 통신사선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선착장에 안착했다.

 


 

탐사 참여 전문가 제언

“한중 교류, 인문문화예술 분야로 확장을”…“물골 역할 상기해야”

▲ 탐사에 참여한 김태만 국립해양박물관장.
▲ 탐사에 참여한 김태만 국립해양박물관장.

이번 탐사에 참여한 국립해양박물관 김태만 관장은 “이번 탐사를 통해서 서긍이 기술했던 여러 섬의 위치나 지명 등을 비정할 수 있었던 점은 의미 있는 시도였다”며 “고대 한중 교류의 성과들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미래의 한중 관계 발전상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김 관장은 특히 “서긍의 고대 항로를 복원하는 사업을 한국·북한·중국이 함께 참여하는 사업으로 추진할 경우 남북은 물론 한중 간 문화교류 차원에서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며 “아울러 신라 때 최초의 조기 유학생이라고 볼 수 있는 최치원의 루트도 한중 간 발굴조사 프로젝트로 확장시키는 등 한중 수교 이후 경제교류 방면에서의 성과를 인문문화예술 방면으로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민속학자인 이윤선 박사(서남해안포럼이사장)도 “역사를 재현하는 고려 뱃길, '고려천년 서긍 900년'의 의미도 크지만, 물길을 추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며 의미를 두었다.

이 박사는 오랫동안 지향하고 천착했던 이론 중의 하나인 '물골론'에 대해 설명하며 “땅이면서 바다인, 뭍과 물을 연결하는 브릿지로서 물골의 역할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높은 산이 있으면 골짜기가 있듯이, 우리가 지나는 바다 밑에도 골짜기처럼 물길이 있다. 그걸 항로라고 하는데, 물골이라고도 한다”며 “고대로부터 물골은 중요했다. 물골 따라 배들이 오갔고, 사람들이 드나들었으며, 문화와 문명이 교류했고, 물골의 끝자락마다에는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물골을 추적해서 답사하는 것은 중요한데, 서긍의 뱃길은 물골을 따라서 이동했던 전거들이 있기 때문에 물골론의 사례로서 혹은 토대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덧붙였다.

 

/인천일보 신고려도경 특별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이재민 기자 leejm@incheonilbo.com

허우범 교수 appolo21@hanmail.net

신춘호 박사 docu8888@daum.net

설재욱 대표 media_29@naver.com

※이 기사는 2022년도 인천광역시 지역언론지원사업으로 시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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