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 넘나든 '고려-송' 교류, 동북아 평화·번영 이끌다


송, 고려 왕자 의천의 유학에 고려사 지어줘
사신은 국신사로 예우…닝보엔 낙빈관 설치

휘종, 40m 규모 선박·700여명 사절단 파견
서긍, 한 달간 개경서 머물며 상호 친선 도모
귀국 후 그간의 활동 기록한 '고려도경' 편찬
당시 사회상·중세 항로 연구에 귀중한 사료

양국, 북방의 요에 맞서 협력…교역량 증가
금에 밀린 송의 천도 땐 수많은 서적 지원도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지난 6월20~22일 전통선박인 조선통신사선을 이용해 송나라 시대 편찬된 <고려도경>에 묘사된 항로 중 흑산도에서 선유도까지의 뱃길을 재현하는 행사를 가졌다. 사진은 당시 서긍의 항로와 이를 지나는 조선통신사선의 모습.

2022년은 한·중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과 중국은 폭발적인 인적·물적 교류를 이뤄왔다. 수교 초기 17여만명이었던 중국인의 방문은 800여만명에 이르렀고, 매년 급증하는 교역은 수교 전에 비해 약 40배에 이른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수출국이 되었고, 중국 또한 한국이 4위의 수출국이 되었다. 양국은 지난 30년 동안 상호협력을 바탕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여 온 것이다.

시대는 언제나 급변한다. 현시대의 동아시아는 지구촌의 중심과도 같다. 이곳에서의 움직임과 방향에 따라 5대양 6대주가 발전하거나 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중 수교 30주년은 그 자체로도 성과와 의미를 지니지만, 21세기 인류 문명사의 발전을 이끄는 출발점이라는 시대적 소명과도 맞닿아 있음을 유념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중국은 수없이 급변하는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해왔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아시아의 문명 발전을 지속시켰다. 900년 전, 고려와 송의 황해를 오가는 교류와 협력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인천일보는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이하여 향후 수교 100년은 물론 양국이 21세기의 소명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방안을 살펴보는 특별기획을 마련하였다. 이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양국의 협력관계가 미래에도 유효한 문명 창조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탐사팀의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작년에 이어 이번 연재에도 영상이 함께한다. 지면에서 다루지 못한 부분은 영상으로 담아낼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격려를 기대해본다.

 


 

▲ 중국 닝보의 '고려사관유지' 비석.
▲ 중국 닝보의 '고려사관유지' 비석.

한국과 중국은 고대로부터 황해를 품은 공동체였다. 동서 양국의 물길이 황해에서 만나듯 황해를 오가며 부국을 이루고 문화를 창달하였다. 양국은 아시아의 지중해인 황해의 에너지를 받아 협력하고 교류하고 발전하며 돈독한 역사를 이어왔다. 두 국가는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이웃이기에 어느 민족보다도 같이 호흡하며 공동체 인식을 강화해 온 것이다. 이처럼 이어져 온 한국과 중국의 상호 교류와 번영의 역사가 지난 30년간의 수교활동에서도 응집되어 나타난 것이다.

인천일보는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이하여 900년 전, 송과 고려가 황해를 오가며 친선의 사절단을 교류했던 현장을 탐사 보도한다. 이러한 우리의 탐사보도는 중세시대 양국의 교류와 상호협력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이를 통하여 한·중 수교의 현재적 의미와 발전방향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다변화하는 글로벌 시대에도 불구하고 양국이 향후 100년의 공동체적 협력관계 구축과 상호 윈-윈 파트너로서 발전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고려와 송은 건국 때부터 상호 사신을 보내 통교하며 협력관계를 구축하였다. 송은 고려의 왕자 의천이 유학을 오자 고려사(高麗寺)를 지어주고, 고려의 사신은 조공사(朝貢使)가 아닌 별도로 국신사(國信使)로 예우하였다. 또한, 황해를 건너 도착하는 닝보(寧波)에는 낙빈관(樂賓館)이라고 부르는 고려공사관(高麗貢使館)을 지어 고려 사신과 상인들의 노고를 위로하며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고려도 송의 사신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예우하고 영접하였다.

▲ 송나라 시대 대고려 무역항이었던 명주(현재 닝보) 항구 상상도.
▲ 송나라 시대 대고려 무역항이었던 명주(현재 닝보) 항구 상상도.

송의 휘종은 고려 사절단에 많은 공을 들였다. 수도인 카이펑(開封)에서 한 달 반의 준비를 거쳐 대운하로 닝보에 도착하였다. 닝보에서는 사절단을 위하여 특별히 신주(神舟) 2척을 건조하였는데, 배의 길이가 40m가 넘는 것으로 당시에는 최대의 크기였다. 아울러 30m의 객주 6척을 포함하여 모두 여덟 척의 선단을 구성하고 서긍을 비롯한 700명이 넘는 규모에 각종 예물과 물품을 싣고 고려로 향하였다.

서긍의 사절단은 5월24일 출항하여 28일부터 8일간 황해를 가로질러 군산도에 도착하였다. 고려에서도 사절단을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는데 사절단의 배가 흑산도에 이르자 해안의 봉수대에 불을 밝혀 안전하게 운항토록 하였으며, 동접반 김부식을 군산도로 파견하여 송의 사절단을 영접하도록 하였다. 이후 사절단은 충남 태안 마도의 안흥정과 인천 영종도의 경원정에서 정박하며 식수를 보급받고 강화도의 염하수로를 거쳐 개성의 벽란도에 도착하였다.

▲ 송나라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
▲ 송나라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

서긍 일행은 약 1개월간 고려의 개경(開城)에 머물면서 상호 친선을 도모하고 귀국하였다. 서긍은 귀국 후, 고려와의 친선교류 과정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기록하여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약칭, <고려도경>)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12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고려와 송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등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중세의 황해를 오가는 항로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어서 학술적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다.

12세기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는 중국의 송(宋), 북방의 요·금(遼·金), 동북의 고려(高麗)가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루고 있었다. 고려와 요는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항상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였고, 실제로 3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요는 중원 진출이 목표였기에 송과도 군사적으로 대립관계였다. 반면, 고려와 송은 상호 요를 견제하기 위하여 우호 관계를 구축하였다.

고려와 송의 친선동맹은 요의 공격에 상호 지원을 요청하고 우군세력으로 후미를 견제하는 기능을 하였는데, 이는 요와의 불편한 관계를 노출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각자 자국의 이익에 따라 추진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와 송은 때때로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하고 상호 협력하기도 하며 통교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양국의 무역은 한시도 단절됨이 없이 지속되었고 점점 교역량도 증가하였다. 고려는 송과의 교역을 통하여 더욱 성숙된 문화국가를 건설하였으며, 이후 다시 송에게 문화국으로서의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는 송이 금에게 밀려 항저우(杭州)로 천도하여 남송(南宋) 시대를 열어갈 때 고려에서 수많은 서적을 보내준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고려와 송의 친선교류는 한국과 중국이 아시아의 지중해인 황해를 오가며 펼친 국제적인 협력관계 구축과 안정적인 번영이었다. 이는 동아시아의 평화적 질서 유지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따라서 고려와 송의 친선교류 과정과 의미를 되새기고, 이러한 친선의 역사를 바탕으로 향후 100년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한·중 수교 30주년과 <고려도경> 탄생 900주년을 맞이하여 양국 모두 뜻깊은 일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 고려와 송의 교류활동을 기록한 그림.
▲ 고려와 송의 교류활동을 기록한 그림.

한·중 교류는 비단 고려 시대뿐 아니라 고대로부터 있어왔다. 특히,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당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며 육로와 해로를 통해 밤낮없이 교류하였다. 당 현종은 안사의 난이 발생하자 촉 땅으로 피난하였다. 신라의 경덕왕은 머나먼 촉으로 위로 사절을 보냈다. 이에 감명받은 현종은 경덕왕에게 '푸르고 푸른 뜻 더욱 중요히 여기고 온갖 어려움에도 영원히 변치 맙시다(益重靑靑志, 風箱恒不渝)'며 진심 어린 마음을 담은 화답시를 보냈다.

한·중 수교 30주년이 갖는 의미는 이처럼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양국의 우호 관계를 현재에도 확고한 믿음으로 승화시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을 실현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물적·인적 교류뿐만 아니라 문화 교류 또한 폭넓게 추진함으로써 양국이 더욱 성숙한 우호 증진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물류(物流)와 인류(人流)뿐 아니라 풍류(風流)가 쉼 없이 황해를 오갈 때 한·중 수교는 더욱 새롭고 힘차게 발전할 것이다. 이는 양국의 발전뿐 아니라 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협력이며, 더 나아가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을 중시하는 아시아적 신문명의 확산에도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인천일보 신고려도경 특별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이재민 기자 leejm@incheonilbo.com

허우범 교수 appolo21@hanmail.net

신춘호 박사 docu8888@daum.net

설재욱 대표 media_29@naver.com

※ 이 기사는 2022년도 인천광역시 지역언론지원사업으로 시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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