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준 수원시정연구원 연구위원·KBO 자문위원.<br>
▲ 조용준 수원시정연구원 연구위원∙KBO 자문위원

'왼손 파이어볼러(fireballer, 강속구 투수)는 지옥에서라도 데리고 와야 한다.' 야구에서 왼손 강속구 투수의 중요성을 알리는 말이다. 그런데 느린 공을 던지는데도 지옥에서 모셔 와야 할 선수가 있다. 두산베어스에서 프랜차이즈 스타로 은퇴한 유희관이다. 그는 개성 있는 좌완투수의 궤적을 영롱하게 보여줬다. 2009년에 데뷔하여 2021년 은퇴까지 통산 281경기에 등판했다. 101승 69패 평균자책점 4.58을 기록했다. 2013년~2020년에는 8년 연속 10승을 달성했다. 이는 KBO리그 역대 4번째 기록이다. 또한 두산베어스 프랜차이즈 선수 최초로 유일하게 통산 100승을 일궈냈다. 두산베어스의 전성기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그는 특유의 넉살과 언변도 뛰어났다. 그 덕에 은퇴 후에는 해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현역 시절 리그에서 가장 느린 공을 던졌다. KBO리그 투수의 직구 평균 구속(球速)은 140㎞/h 초중반이다. 그의 구속은 직구 130㎞/h, 변화구 120㎞/h 정도였다. 가끔 73㎞/h의 초저속 커브를 던지기도 했다. 그런 공에 타자는 당황했고 팬들은 즐거워했다. 그야말로 느림의 미학이다. 이런 느린 공으로 어떻게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까? 이는 '닻내림 효과'(anchoring effect)로 설명할 수 있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흥미로운 주장을 제시했다.

살다 보면 막연하게 무엇인가를 예측해야 할 때가 있다. 이때 인간은 불완전한 조정 과정에서 선택의 위험을 생각한다. 그래서 위험을 줄이기 위한 최초의 기준점을 정하려 한다. 기준은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미세한 조정 과정을 거쳐 설정한다. 이후 예측의 범주는 이 부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합리적 추론이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런 현상을 '닻내림 효과'라고 한다. 배가 항구에 닻(anchor)을 내리면 연결한 밧줄의 범위 내에서만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행동경제학에서 닻내림 효과는 주로 부정적 의미로 사용한다. 왜곡된 정보에 집착하여 합리적 판단이 어렵다는 결론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 해석도 가능하다. 닻내림 효과는 현상에 대처하려는 인간 본성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새로운 상황에 닥치면 새로운 기준을 정한다. 그리고 현실 인식, 상황 적응, 해결책 도출의 과정을 거친다.

유희관은 닻내림 효과를 긍정적으로 이용했다. 120㎞/h 초반의 느린 변화구로 일단 타자의 기준점을 낮췄다. 이후 130㎞/h 초중반의 빠른(?) 직구로 타자의 기준점을 흩트렸다. 그리고 타자의 허를 찔렀다. 물론 속도 조절만으로 타자를 제압할 수는 없다. 그의 공은 빠르지 않았지만, 뛰어난 제구력과 완급조절이 그의 최대 무기였다. 또한 타자를 당황하게 하는 절묘한 변화구도 그의 장점이었다. 이런 요인들이 그의 성적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간다. 이 사회는 구성원에게 수준 높은 학력과 능력을 요구한다. 스마트 개인이 스마트 사회를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사회에서 보편적이며 천편일률적인 상향 평준화는 변별력이 없다. 스마트 사회에서 더 스마트하게 살아남는 방법을 유희관에게 배운다. 느림의 미학은 개인의 능력을 멋들어지게 표현하는 근사한 방법일 수 있다.

/조용준 수원시정연구원 연구위원∙KBO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