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개발 정책 선도…신산업 주춧돌 놔
1981년 체신부 차관 발탁·TDX 연구
4메가디램 반도체 기업 합심 개발 견인
인천공항·영종도 글로벌도시 등 구상
인천글로벌캠 해외대학 유치 힘 보태
통신 수단이라고는 우편밖에 기댈 게 없었고, 집에 전화를 놓으려면 1년씩 걸리던 시절, 오명(83) 전 부총리는 정보통신(IT) 기술로 연결되는 사회를 내다봤다. 한국 현대사에서 대표적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로 꼽히는 그는 연구개발(R&D) 정책을 선도하며 신산업에 주춧돌도 놨다.
한국뉴욕주립대학교 명예총장인 오 전 부총리가 지난 5일 인천 송도국제도시에서 신용석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국제협력특보와 대담을 가졌다. 인천국제공항에 '동북아 허브 공항' 개념을 접목시킨 것도, 인천글로벌캠퍼스에 해외 대학 유치를 이끌어낸 것도 그의 혜안에서 비롯했다. 2시간여에 걸친 문답은 반세기를 넘나들었다.
▲육사를 졸업하고 서울대와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대에서 공부하셨습니다. 독특한 이력인데요, 전공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자공학을 전공했습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로 학사 편입을 했고, 1972년 스토니브룩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죠. 그때부터 이미 미래는 전자 시대가 될 거라는 예측이 나왔어요. 미국에서도 컴퓨터는 대형만 있고, 소형은 보급이 안 된 시기였죠.
▲정보통신 기술이 경제 발전을 견인할 거라고 전망하셨는지요.
-1970년대 후반부터 '정보화 사회'라는 개념이 나왔습니다.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까지 겪었는데 '제3의 물결'이 밀려올 때 또다시 쓰라림을 되풀이하면 안 된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고 생각했죠. 정보화를 이루려면 두 가지가 필요했어요. 컴퓨터 처리 능력과 통신 정보 전달 능력이었습니다.
▲공직 입문 직후였던 1981년 체신부 차관으로 발탁됐습니다. 지금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이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체신부는 우편이 주업무인 부처였잖아요.
-청와대 비서관으로 있을 때 당시 김재익(1938∼1983) 경제수석이 전자산업을 일으키려면 체신부로 가야 한다고 제의했습니다. 처음에는 1∼2년 하다가 이전에 근무했던 국방과학연구소로 갈 마음이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일했어요. 가장 먼저 직면한 과제는 통신 문제였습니다. 전자식 전화 교환기를 도입하려면 기술 개발이 시급했는데, 정부 조직으로는 투자와 인력 측면에서 묶일 수밖에 없었어요. 체신부 8만명 조직에서 절반을 떼어내는, 전례가 없는 작업을 거쳐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설립됐습니다. 곧이어 기업 투자를 받아 정보통신을 전담하는 한국데이타통신주식회사(데이콤)가 만들어졌죠.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 정책은 일본보다 한발 빨랐습니다.
▲1980년대 초반이면 전화 개통도 '하늘의 별 따기' 같았던 시절이었는데요.
-국내 기술로 전화 교환기를 만들지 못해서 외국 제품을 구입해서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격이 비쌌고, 집에 전화기를 놓으려고 해도 보통 1년씩 기다려야 했죠.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를 만들고, 기업 연구진을 차출해서 전자교환기(TDX) 개발 사업에 착수했습니다. 1차 개발비만 240억원이었어요. 과학기술 프로젝트 1건당 예산이 10억원도 넘지 않았을 때니까 '단군 이래 최대 연구개발 사업'이라고 불릴 정도였죠. 4년 만에 국산 교환기가 개발되면서 1987년 1000만 회선을 돌파했고, 신청 하루 만에 전화를 개통해주는 나라가 됐습니다.
▲통신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던 연구개발 프로젝트였다고 봅니다.
-그때 말이 많았어요. '40대 초반 차관이 어떻게 책임지려고 저러느냐'는 얘기였죠. 연구개발은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투자했습니다. 실패해도 없어지는 돈이 아니라 기술은 남고, 개발을 시작하면 제품 구매 가격도 떨어뜨릴 수 있거든요. 당시 전자교환기를 사들이는 예산이 연간 5000억원이었습니다. 240억원 투자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반도체 개발도 마찬가지였죠. 전자통신 분야에서 반도체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으니까 체신부가 투자하고, 기업들과 합심해서 '4메가디램' 개발에 나섰습니다. 그때가 1986년이었는데 국가 프로젝트가 되면서 1년여 만에 개발에 성공했고, '64메가디램'은 1992년 세계 최초로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인천과의 인연도 각별합니다. 인천국제공항 건설 과정에서 숨은 공로자로 알고 있습니다.
-1993년 교통부 장관으로 취임하고, 이듬해 건설부와 통합된 건설교통부 장관을 맡았을 때 핵심 사업이 '신공항'이었습니다. 김포공항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대체 공항 건설 정책이 결정됐는데, 착공 초기에 장관으로 들어갔죠. 동북아가 세계로 나아가고 있었고, 한중일에서 중심이 되려면 공항이 중요했어요.
▲'동북아 허브 공항' 개념도 그때 나왔죠.
-일본이 먼저 동북아 허브를 겨냥해 간사이공항을 만들었습니다. '일본한테 또 졌구나'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까 인공섬이라 불안정했고, 활주로도 하나뿐이었어요. 인천국제공항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했습니다. 활주로를 늘리면서 외국 항공사가 거점을 둘 수 있는 기반 시설, 화물 처리 등을 통해 허브 개념을 도입했어요. 또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둔 때였으니까 다국적 기업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고 봤어요. 국내 법률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 비즈니스 도시, 이른바 '영종도 세계자유도시' 구상이었죠. 훗날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긴 했지만, 당시 국제도시 프로젝트가 보류된 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에 글로벌캠퍼스를 조성하는 데에도 힘을 보태셨는데요.
-안상수 전 인천시장 재임 시기에 해외 대학을 인천글로벌캠퍼스에 유치하는 양해각서(MOU)가 체결됐는데 진척이 없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래서 모교인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대를 설득한 거죠. 세계금융위기로 경기가 좋지 않을 때라 분교를 없애는 추세였어요. 2년 반에 걸친 협의 끝에 2012년 인천글로벌캠퍼스에서 처음으로 한국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대가 개교했고, 패션기술대도 문을 열었습니다. 교육은 장기적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외국 교육 시스템을 도입하고, 산업과 연계하려면 장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뒷받침해야죠. '케이컬처'가 뜨고 있는데, 세계적 패션 교육기관인 패션기술대를 활용하면 경제자유구역도 주목받지 않을까요
/대담 신용석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국제협력특보
/정리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IT혁명의 선구자...과학기술 발전 매진
오명 전 부총리는 누구?
오명 전 부총리는 정보통신(IT) 혁명을 이끌어낸 선구자로 꼽힌다.
체신부·교통부 장관에 이어 초대 건설교통부·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낸 공직자이자 대학 총장을 두루 역임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정권을 가리지 않고 요직을 거친 배경에는 과학기술 발전에 매진한 뚝심이 깔려 있었다.
오 전 부총리는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이었던 1980년 마흔 살 나이에 청와대 비서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부터 6년간 체신부 차관을 지냈고, 1987년 장관으로 취임했다. 그가 7년 8개월에 걸쳐 일하는 동안 체신부는 정보화 사회로 나아가는 기틀을 닦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시대를 앞서간 전산 시스템을 개발해 세계에 선보인 대회로 평가받는다.
1993년 대전 엑스포 조직위원장을 맡아 국제 공인과 참가국 유치를 이끌었고, 엑스포가 끝난 뒤에는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에 이어 김영삼 전 대통령 부름을 받아 문민정부에서 교통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이듬해 건설부와 교통부가 통합한 초대 건설교통부 장관도 맡았다.
참여정부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삼고초려 끝에 과학기술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2004년에는 최초의 과학기술부총리에 올랐다.
공직에서 물러난 동안에는 학자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아주대와 건국대 총장에 이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사장을 지냈다. 2016년부터는 한국뉴욕주립대학교 명예총장을 맡고 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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