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이후 138년, 인천인 흘린 피땀 국제항 발전 일궈

일제 강점 62년·미군 주둔 25년
전부 혹은 일부 외세가 지배·관할
국민소득 130달러 불과하던 시절
드라마처럼 제2도크 건설 이뤄내

해안 매립·조선업 관련 내용 누락
국내외 인사·시민 사회 일화 부족
후일 유능한 다른 필자가 채워주길
▲ 1880년대. 개항 초기의 제물포 포구 풍경. /사진출처=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1880년대. 개항 초기의 제물포 포구 풍경. /사진출처=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
▲ 1940년대. 1918년 일제가 완공한 인천항 제1도크(사진 아래쪽)와 1943년 중단했던 제2도크./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 100년
▲ 1940년대. 1918년 일제가 완공한 인천항 제1도크(사진 아래쪽)와 1943년 중단했던 제2도크./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 100년
▲ 1950년대. 다른 각도에서 본 제1도크와 중단된 제2도크 풍경./사진출처=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 1950년대. 다른 각도에서 본 제1도크와 중단된 제2도크 풍경./사진출처=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이제 거의 1년에 가까웠던 이 연재의 종결에 다다랐다. 오늘 이 순간, 지난 이야기들의 큰 줄거리들을 되짚어보면, 1883년 개항으로부터 한 세기도 훨씬 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천항에 얽힌 숱한 이야기들―일제의 포함(砲艦)에 의한 강제 개항 후, 저들의 강점기 동안 압제와 차별로 점철된, 암울했던 역사의 굴레에 매어 있었으면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인천 사람들의 이야기, 광복에 이은 전쟁과 주둔 미군과 원조에 기대어 생존을 구했던 쓰라린 사연들, 황야에서 맨몸을 일으키듯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경제력으로 마침내 이룩한 인천항의 어제, 그리고 오늘 국제항으로의 발전상을 소략한 대로 짚어 왔다. 곁들여 인천항 언저리 서민 삶의 명암을 편편(片片)이나마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을 집필하면서 내내 가졌던 몇 가지 감회 중 하나는 개항장 제물포, 그리고 인천항에 얽힌 수많은 곡절과 사연 외에도 우리 강토, 우리 인천항에 우리 주권이 온전히 미쳤던 세월에 관한 것으로 개항 138년 역사 동안 고작 반세기에 불과했었다는 씁쓸함이었다. 개항 이후 줄곧 일제의 손아귀에 놓였던 강점 기간 62년, 그리고 광복 후 4년과 1950년부터 1971년까지의 미군 주둔 25년을 합해 87년간 제물포, 인천항은 우리가 주인이 아닌 타자의 지배 아래, 아니면 일부라도 그 관할 아래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현실에서 그 기간을 따져본들 그것이 구태여 무슨 의미를 가질 것인가. 더구나 오늘날의 인천항의 그 역동적인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처럼 지난 일에 대해 씁쓸한 감회에 젖는 것은 실로 부질없는 감상적 태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정식으로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문외(門外)의 필자가 역사적 사실 자체를 엄격하게 객관화 하지 못하는 안목의 낮음이 그 이유일 것이다.

또 한 가지 감회는 천혜(天惠)를 얻지 못한 인천항의 입지적 불리(不利) 때문에 인공 도크 항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후일 인천항이 전면 도크화된 이후에도 갑문 출입에 따른 시간 소요와 선석 부족, 그로 인한 선박의 장시간 외항 대기, 체선 발생, 해상 하역으로 인한 비능률 같은 나쁜 조건들로 한때 선박들이 인천항을 기피 항만으로 낙인찍었던 사실 역시도 이 연재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1970년대. 일제가 축조한 제1도크와 중단한 제2도크가 1966년에 시작된 인천항 전면 내항화 공사로 변한 모습./사진출처=인천항만공사
▲ 1970년대. 일제가 축조한 제1도크와 중단한 제2도크가 1966년에 시작된 인천항 전면 내항화 공사로 변한 모습./사진출처=인천항만공사
▲ 1974년 완공으로 전면 내항화한 인천항의 갑문./사진출처=인천지방해양청
▲ 1974년 완공으로 전면 내항화한 인천항의 갑문./사진출처=인천지방해양청
▲ 오늘날의 인천 내항 전경./사진출처=인천항만공사
▲ 오늘날의 인천 내항 전경./사진출처=인천항만공사

이 글을 써 오는 동안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광복을 거치고 6·25전쟁에 휩쓸리면서도 인천항 도크는 완파(完破)되지 않았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물론 그 같은 사실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할 문건은 접하지 못했으나, 당시 신문이나 그 외의 어느 문건에서도 완전한 파손으로 인해 인천항 도크 사용이 불가능함을 언급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그 증명이라 할 수 있다. 따져보면, 갑문을 통과해야 하는 불편한 인천항 도크가 전술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피아(彼我)에 다 별무용(別無用)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투 중에 일부분 피해는 갔을지 몰라도, 그 같은 상황에서 굳이 도크를 완전히 폭파시키거나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되돌아볼 때, 제2도크 건설, 곧 인천항 전면 내항화 역시도 산업화만이 오직 선(善)이라는 당시 권력자의 무리(無理)와 돌파가 있었다고는 해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완성을 이루어 내었다는 생각이다. 제2도크 축조 시작 당시 우리의 경제력이라는 것이 겨우 국민소득 130달러로 막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마친 1966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로써 개항 역사 이래 처음으로 순수 우리 손의 인천항이 되었던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밖에 오늘날의 거대 국제항이 되기까지 숱한 곡절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겠지만, 개항 초기부터 인천항에서 땀 흘리며 분투했던 선구자들, 노동자들의 헌신, 그리고 항만 언저리 서민 대중의 남모르는 희생과 비애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역사요 자산이었다는 생각이었다.

거듭 인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인천항의 역사는 실로 끝없는 도전의 연속과 역경의 점철이었음에도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해낸 인천인의 의지와 정신은 위대한 것이었음을 거듭거듭 상기했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스스로 아쉬운 점을 말할 차례다. 총 50화의 이야기를 쓰면서 대부분의 줄거리가 천착의 얕음, 그리고 다채로운 사례 동원의 부족을 면하지 못한 점을 가장 큰 미흡으로 고백한다. 더구나 인천항 형성에 있어 반드시 기록했어야 할 해안 매립 관련, 명맥을 이어온 조선업 관련 부분을 부득이 누락한 점은 끝내 이 연재를 미진한 것으로 남게 한 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 인천항이 열린 후, 이곳을 관문으로 해서 들고난 국내외 인사들에 대한 기록도 인천항 혼자만이 가질 수 있는 흥미로운 자산이었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비춰보지 못한 점, 특히 일찍부터 각지에서 유입된 인천항 노동인구와 그로 형성된 부둣가 시민 사회의 일화 역시도 충분히 한 삽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들로 인한 인천항의 식문화(食文化) 발전사, 또한 인천항 관련 예술 작품의 일별 또한 인천항을 조망하는 이야기의 몫으로 넉넉히 위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두고두고 후회와 아쉬움의 대상으로 남는다.

인총도 적었던 삭막한 개펄, 포구에서 오늘날 우리나라 대표 국제항으로 우뚝 선 인천항의 다가올 내일, 그 역동의 미래에 대해서는 후일의 유능한 어떤 필자의 붓끝을 기대한다는 말을 남기면서 드디어 마지막 인사를 드릴 시점임을 고한다.

그동안 여로 모로 부족한 이 연재를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아울러 지난 1년간 귀중한 지면을 할애해 주신 인천일보에도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또한 자료 사용으로 많은 폐를 끼친 각 기관·단체·독지가 여러분께도 이 자리를 빌려 머리 숙여 큰 고마움을 전한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