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향토 하역업체 3사 '100세 기업' 향해 뚜벅뚜벅


1910년 응신청 해체 이후 '조' 화주와 직접 거래
노동운동·기업 경영 병행 곤란 겪자 하역권 이양
1945년 4개사 그쳤으나 1948년 18개사로 폭증
이듬해 인천항만하역협회 창설…7개사로 통폐합
1960년대 수출입 물량 늘어나며 20개사로 팽창

문병하 한염해운 회장, 인천일보 사장 지내기도
선광·영진공사·우련통운, 60년 넘게 지역에 뿌리
 

 

▲ (위로부터)선광의 인천항 사일로 전경, 영진공사 컨테이너 하역 작업, 그리고 우련통운 작업 현장이다. 이들 삼사(三社)는 인천의 대표적인 향토기업으로 오늘도 인천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백세 기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사진제공=회사 홈페이지 및 유튜브 영상

항만의 핵심 업무인 화물의 입출항을 맡아 하는 주역의 한 축으로 부두노동자인 인천항운노조원이 있다면, 또 다른 한 축은 하역회사들이 맡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 양자는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늘과 실처럼 긴밀한 연계 관계에 있는 것이다.

전화(前話) ¨제물포 모군에서 인천항운노조까지〃에서 언급한 대로 1910년 응신청이 해체된 이후 광복까지 인천항의 하역 작업은 두 개의 일본인 하역회사 외에는 '조(組)'라는 한국인 노동자 집합 형태의 조직이 화주(貨主)와의 직접 거래를 통해 맡아 해왔다.

▲ 평화공사 심의균(沈宜均) 사장이 유도 진급 심사에서 장년부 1급을(乙)에 진급했다는 1928년 3월30일자 중외일보 기사. 그는 인천의 한국인 유도장에서 기술을 연마한 유도 1세대이기도 하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평화공사 심의균(沈宜均) 사장이 유도 진급 심사에서 장년부 1급을(乙)에 진급했다는 1928년 3월30일자 중외일보 기사. 그는 인천의 한국인 유도장에서 기술을 연마한 유도 1세대이기도 하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이 '조'는 화주로부터 작업을 수주하는 일, 곧 작업권 확보와 더불어 노동자의 임금 보장을 위한 교섭, 산하 노동자의 배치, 작업 일정 관리 등 원활한 작업 수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외적으로는 작업권 확보를 위해 늘 다른 '조'와의 치열한 경쟁에도 나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는 노동조합 비슷한 형태이면서 오늘날의 하역회사 역할의 일부까지도 해온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영세와 일제의 하역 독점으로 인해 실제 인천항에 한국인 경영의 전문 하역회사는 출현하지 않는다. 가능성을 가졌던 각 '조' 역시 기업으로 발전하지는 못한 채, 몇백명 노동자 조합체로 머물러 있다가 광복을 맞는다. 여러 이유가 있을 터이나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이, 경제이론에서 말하는 생산 요소, 즉 노동과 자본이라는 서로 다른 두 요소가 하나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일 것이다.

하역회사는 화주로부터 하역권을 수득한 상태로서 일단 화주(자본)를 대리하는 입장이 된다. 거기에 대해 노동자들은 단순히 화물을 하역하는 노동을 맡는다. 그런데 '조'가 하역회사로 발전했다면, 자신이 화주이면서 동시에 화물 하역을 전담하는 노동자로서 노사관계가 엉키고 만다.

시대를 바꿔 광복 후인 1947년, 자유노조가 겪은 실패한 자본과 노동의 혼합 경험이 바로 그런 실례이다. 그 내용은 ‥인천항 변천사…에 나온다.


자유노조는 1947년 7월 1일 미군 작업 입찰에 있어서 적정 임금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면서 투쟁에 나서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이에 미군측은 경쟁 입찰을 중지하고 노동조합에서 직영을 하라고 하여 이를 수락하고 미군화 작업을 직영하였다.

그러나 노동운동과 기업 경영을 병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연말에 하역권을 기업체에 이양하고 노동조합으로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면서 체통을 확립하였다.


노조는 노동에만 종사했을 뿐 기업 경영의 경험은 전무한 상태에서 '자본(화주)'의 입장까지 겸하려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할 것이다. 뒤에 나오지만, 노조가 자유노조하역부(自由勞組荷役部)라 하여 하역회사 역할을 맡기도 했던 것이다.

일제가 물러간 후, 혼란한 사회상을 반영하듯 인천항에도 구심점 없이 개별 노동자들만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화주는 화주대로 하역 교섭 대상, 주체가 없어 곤란을 겪고, 개별 노동자들은 노동자들대로 하역 일자리 확보나 임금 교섭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여기서 하역업 영위를 목적으로 하는 하역업자가 탄생하는데, 이 시기에 인천항에 밀려든 미군 군수물자, 원조물자 물량이 하역회사의 탄생을 자극했던 것이다. 당시 창업한 하역회사들은 ‥인천항 변천사…와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1945년에 조선운송(朝鮮運送), 복도조(福島組), 경전조(慶田組), 평화공사(平和公社) 등 4개사가 탄생한다. 이어 1946년에는 숫자는 변동 없이 조선운송을 비롯해 제일항만작업사(第一港灣作業社), 도양사(島洋社), 부흥사(復興社) 등이 이름을 보이고, 1947년에 들어서는 조선운수(朝鮮運輸), 자유노조하역부, 조흥사(朝興社), 도양사, 제일항만, 대한운수(大韓運輸), 삼국석탄(三國石炭) 등 7개사로 증가한다.

▲ 1947년 5월10일자 한성일보에 실린 복도조(福島組) 회사 광고. 회사 경영진 중 문순모(文順模) 전무는 후일 한염해운을 설립한 하역업계의 원로이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7년 5월10일자 한성일보에 실린 복도조(福島組) 회사 광고. 회사 경영진 중 문순모(文順模) 전무는 후일 한염해운을 설립한 하역업계의 원로이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7년 5월10일자 한성일보 광고이다. 경전조(慶田組)는 일제 때 인천항에 있던 일본인 하역회사 명칭이었는데 광복 직후여서인지 그대로 그 명칭을 답습하고 있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7년 5월10일자 한성일보 광고이다. 경전조(慶田組)는 일제 때 인천항에 있던 일본인 하역회사 명칭이었는데 광복 직후여서인지 그대로 그 명칭을 답습하고 있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삼국석탄은 대인부두가 있던 만석동 2번지에 소재했다. 석탄공장이었던 대로 석탄만 전문으로 하역하던 회사였다. 1947년 5월10일자 한성일보 광고./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삼국석탄은 대인부두가 있던 만석동 2번지에 소재했다. 석탄공장이었던 대로 석탄만 전문으로 하역하던 회사였다. 1947년 5월10일자 한성일보 광고./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9년 4월10일 수산경제신문의 하역업자 지정 기사이다. 인천항의 수입 물자를 특화해 전문 회사별로 하역토록 당시 외자총국(外資總局)에서 업체를 지정했다는 내용이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49년 4월10일 수산경제신문의 하역업자 지정 기사이다. 인천항의 수입 물자를 특화해 전문 회사별로 하역토록 당시 외자총국(外資總局)에서 업체를 지정했다는 내용이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소폭 증가하던 하역업계는 1948년에는 무려 18개사로 늘어난다. 이듬해 1949년에 인천항만하역협회(仁川港灣荷役協會)가 창설되면서 이 같은 하역회사의 난립으로 업자간의 과열 경쟁 등 업계 무질서에 따른 공멸(共滅) 위기감으로 조선운수, 상호운수(相互運輸), 대한운수, 동아제재(東亞製材), 한국운수(韓國運輸), 협동해운(協同海運), 한청기업(韓靑企業) 등 7개 회사로 통폐합된다.

이어 1950년에는 대한통운(大韓通運), 협동해운, 상호운수, 한청기업, 한염해운(韓鹽海運)의 5개사로 다시 통폐합되고, 6·25를 거치면서 잠시 잠잠하던 인천항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무역정책에 따른 수출입 물량 증가에 힘입어 무려 20개 회사로 팽창한다. 그 회사들은 다음과 같다.

제일운수(第一運輸), 대동운수(大東運輸), 신한공사(新韓公社), 럭키, 고려(高麗), 후리스코, 범양(汎洋), 보신(輔信), 동방운수(東邦運輸), 선광공사(鮮光公社), 영진공사(榮進公社), 신일해운(信一海運), 국제통운(國際通運), 세신공사(世信公社), 유니온해운, 국제실업(國際實業), 태평양운수(太平洋運輸), 대한제분(大韓製粉), 삼미사(三美社), 우련통운(友聯通運) 등으로 실로 “하역만능의 시대”를 열었다.

주마간산이나마 이렇게 광복 후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동안 인천항 하역회사들의 명멸과 부침을 살펴보면서, 문득 평화공사의 심의균(沈宜均) 사장이나 제일항만작업사의 주연길(朱連吉) 사장, 두 분의 성함을 떠올리게 된다. 심 사장은 인천항 객주였던 심능덕(沈能德)의 자제로 초기 경인기차 통학생이었으며, 인천항자유노조를 창설한 유창호(柳昌浩)의 유도장 인천무도관(仁川武道館)에서 유도를 배운 인천의 1세대 유도인이었다. 주연길 사장 역시 초기 인천항 하역계의 선도자의 한 분으로, 그의 장인이 일제 때 국악동호인 모임인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 멤버 최선경(崔銑卿)이었다.

선광공사의 심명구(沈明求) 회장, 영진공사의 두 형제분,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이기성(李起成)·인천시의회 의장을 역임했던 기상(起祥) 회장, 한염해운의 두 부자분 문순모(文順模)·병하(炳河) 회장은 인천 하역업계의 증인들이었다. 특히 문병하 회장은 본지, 인천일보 사장을 지냈었다. 그리고 만년(晩年)에 자유공원 길을 오르던 우련통운의 어른, 일제 때 유명 럭비선수 배인복(裵仁福) 회장도 기억할 분이다. 분명 이분들은 한 시대 인천항의 주역들이었다.

창설 당시의 인천하역협회는 이제 인천항만물류협회로 이름을 바꾸고, 한진(韓進), 대한통운, 동방(東邦), 세방(世邦), 동부(東部) 등 전국 규모의 대기업 등 30여 하역 관련 회사가 소속되어 인천항의 질서 있는 하역, 물류를 위해 협동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인천의 대표적인 향토기업으로서, 거센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제 환갑 나이를 넘어 100세 기업을 향해 달리고 있는 선광, 영진공사, 우련통운 삼사(三社)는 오늘도 인천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파트너 인천항운노조, 그리고 인천시 300만 시민과 고락을 함께하고 있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