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조기 멸종되고 부두 신설 잇따르니 옛 영화 오간데 없네

▲화수부두
땔감 많이 들어와 '나무선창' 유명세
1950~60년대 조깃배 몰리며 전성기
연안부두·소래포구에 밀려 쇠퇴일로

▲만석부두
일제강점기 공업지대 조성 따라 축조
원목 저목장 조성…어선부두로도 두각
계속된 매립으로 지형·역사 묻혀버려
▲ 화수부두 전경 사진. 일찍이 '나무선창'이라는 별칭을 가졌던 이 부두는 어업 기지로서도 인천의 대표적인 곳이었다. 1970년대 중반 제2도크가 완공되고 연안부두가 생기면서 어선들이 연안부두나 소래포구로 이전해 가고, 근해 어업의 쇠퇴로 쇠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주변의 공장과 매립으로 좁다란 수로만 한 줄 남아 있다./사진제공=인천광역시 동구청 ‥동구사…
▲ 화수부두 전경 사진. 일찍이 '나무선창'이라는 별칭을 가졌던 이 부두는 어업 기지로서도 인천의 대표적인 곳이었다. 1970년대 중반 제2도크가 완공되고 연안부두가 생기면서 어선들이 연안부두나 소래포구로 이전해 가고, 근해 어업의 쇠퇴로 쇠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주변의 공장과 매립으로 좁다란 수로만 한 줄 남아 있다./사진제공=인천광역시 동구청 ‥동구사…

영고는 성쇠(盛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번창하고 융성함, 그리고 쇠퇴와 약해짐을 뜻한다. 한 단어 안에 서로 상반되는 두 뜻이 들어 있다.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인천의 대표적인 부두였던 화수, 만석 옛 부두들이 맞은 운명을 말하기 위해서다. 1974년 제2도크가 건설되면서 연안부두가 생기고 뒤이어 북항이 건설됨으로써 번창했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싶게 쇠퇴를 맞았기 때문이다.

▲ 화수부두 인근 송현동 해변에 인천연료주식회사가 설립되었음을 알리는 1939년 10월17일자 매일신보 기사이다. 이 회사는 화수부두로 들어오는 화목(火木)을 인천시내에 공급하는 회사이다. 회사는 송현동에, 나무의 저장과 판매를 위한 시장인 '시탄시장'은 화수부두에 두었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화수부두 인근 송현동 해변에 인천연료주식회사가 설립되었음을 알리는 1939년 10월17일자 매일신보 기사이다. 이 회사는 화수부두로 들어오는 화목(火木)을 인천시내에 공급하는 회사이다. 회사는 송현동에, 나무의 저장과 판매를 위한 시장인 '시탄시장'은 화수부두에 두었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화수부두가 언제 생겼다고 딱히 집어 말할 수는 없다. 이곳에 부두가 생기기 훨씬 전의 모습만이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 “화수동 일대도 인가가 매우 적고, 산림이 우거진 인천 유일의 녹화지대이며, 현 화수2동 일대에는 산림과 묘지가 있었고, 이괄(李适)의 묘도 있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는 까닭이다.

이런 산림지역이었으니 사람들은 바닷가 근처에 살기 시작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어업에 종사하는 취락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갯골이 많아 작은 목선들에게 유리한 이곳이 점차 발전해 포구가 되고, 그러다가 개항 이후 일제가 내항 일대를 차지하면서는 조선인들의 어선들이 이곳으로 떠밀려와 좀 더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만석동 일대 해안을 훑어 송현동, 화수동 쪽으로까지 진출해 매립을 하고 축대를 쌓게 되면서 점차 부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혹 이 명칭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전에는 화수부두를 '나무선창'이라 부르던 때가 있었다. 반갑게도 이 명칭은 동구청에서 펴낸 ‥동구사(東區史)…에 살아 있다. 과거 이 부두에 가옥용 목재나 땔감으로 쓰이는 소나무, 낙엽송 등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증언까지 붙어 있다.

▲ 외항의 화물선에서 작은 목선으로 하역해 온 양곡을 만석부두에서 가마니에 넣어 부두에 쌓고 있는 광경이다. 6·25전쟁 이후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만석부두는 어항으로, 또 인천항에 입하하는 화물부두로 큰 역할을 했으나, 오늘날은 쇠퇴해 낚싯배나 뜨는 한적한 부두가 되고 말았다./사진제공=인천광역시 동구청 ‥동구사…
▲ 외항의 화물선에서 작은 목선으로 하역해 온 양곡을 만석부두에서 가마니에 넣어 부두에 쌓고 있는 광경이다. 6·25전쟁 이후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만석부두는 어항으로, 또 인천항에 입하하는 화물부두로 큰 역할을 했으나, 오늘날은 쇠퇴해 낚싯배나 뜨는 한적한 부두가 되고 말았다./사진제공=인천광역시 동구청 ‥동구사…

나무선창이라는 속칭은 1939년 10월, 인근 송현동 해안가에 인천연료주식회사(仁川燃料株式會社)가 설립됨으로써 더욱 굳어졌을 것이다. 이 회사는 널리 알려진 인천의 인사들, 김용규, 김세완, 이훙선, 김윤복, 유창호 등이 중역으로 참여해 설립했는데, 주 사업 목적이 연료와 목재의 매매업이었기 때문이다.

시내에 땔감상이 산재해 있어 거래도 무질서했고, 또 항만 교통 방해와 도시 미관 저해의 원인이라 하여 일찍부터 땔감시장을 괭이부리로 통합해 옮긴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결국 인천연료주식회사를 이곳에 설립해 땔감시장을 정비했던 것이다. 이 회사는, 본사는 송현동에, 그리고 시탄시장(柴炭市場)이라고 부르던 공설시장은 나무의 집산(集散)이 편리한 인근 화수부두에 열었다.

광복과 6·25를 거치면서 유명무실해졌으나, 화수부두에 남아 있던 4950㎡ 넓이의 시탄시장 부지만은 휴전 직전인 1953년 6월1일, 시내 각 기관장들이 회합을 가지고 수입 양곡과 비료 하역장으로 전용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인천항의 보조 부두로 쓰이게 된다.

제1도크가 전쟁으로 크게 상처를 입은 데다가, 그나마도 미군 관할이어서 인천항 전체가 하역부두 부족으로 체선(滯船), 체화(滯貨)가 극심했던 까닭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6월11일자 조선일보는 시장 내 건물의 철거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도하기도 한다.

▲ 1950년 9월20일, 인천상륙 후 인천항에 진주한 미군이 촬영한 이른바 만석동 조기부두(朝機埠頭, 조선기계제작소 부두) 소형 도크에 버려진 일본군 소형 잠수정 사진이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일제는 조선기계제작소에서 잠수정을 제작했다. 조기부두 또한 광복 후로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인천항의 주요 하역부두였다./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 1950년 9월20일, 인천상륙 후 인천항에 진주한 미군이 촬영한 이른바 만석동 조기부두(朝機埠頭, 조선기계제작소 부두) 소형 도크에 버려진 일본군 소형 잠수정 사진이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일제는 조선기계제작소에서 잠수정을 제작했다. 조기부두 또한 광복 후로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인천항의 주요 하역부두였다./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화수부두의 융성은 195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조기잡이 출어 어항으로서였다. 조기 어획 철이면 많을 때는 200여 척 조깃배가 화수부두에 들어와 만선의 황금 조기를 풀어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인천의 주 어항이었던 현 8부두 자리 경기어련(京畿漁聯) 부두보다도 더 많은 배가 이리로 들어왔던 것이다. 연평도에서 잡은 조기는 물론이거니와 멀리 전라도 흑산도에서까지 싣고 온 황금색 조기들이 부두를 가득 메우던 은성한 시절이었다.

특히 화수부두 선적(船籍)의 어선들이 어로작업에 나갔다가 떼 지어 몰려다니는 중국 어선의 횡포에 시달리거나, 북한에 나포되었다는 당시 기사들을 보아도 이 부두가 인천항에서 차지하는 어항으로서의 비중 또한 상당히 컸었음을 알 수 있다.

조기 멸종으로 대규모 선단이 떠난 뒤, 근해의 잡생선 종류나 강화 등 인근 도서 지역에서 담근 새우젓 따위를 들여오는 부두로 명맥을 잇다가, 대부분의 선박이 새로 생긴 연안부두와 소래포구로 이전해 감으로써 쇠퇴일로를 걸었다.

현재 만석부두만 남아 있는 만석동 일대에는 넓은 해안에 여러 군소 부두들이 들어서 있었다. 일제 때 공업지역으로 조성된 까닭에 거대 공장들이 문을 열면서 자체적으로 축조한 부두들이었다. 광복으로부터 6·25, 그리고 제2도크 완공 때까지 이 부두들은 인천항의 태부족한 하역장을 보완하는 부두로 요긴히 사용되었다.

▲ 만석동 시절 대성목재 공장 건물과 엄청난 원목이 쌓인 저목장(貯木場) 모습을 볼 수 있다. 1936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전국 굴지의 목재회사였다./사진제공=인천광역시 동구청 ‥동구사…
▲ 만석동 시절 대성목재 공장 건물과 엄청난 원목이 쌓인 저목장(貯木場) 모습을 볼 수 있다. 1936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전국 굴지의 목재회사였다./사진제공=인천광역시 동구청 ‥동구사…

판유리부두(한국판초자공업)니, 세신부두(세신공사)니, 또는 석공부두(석공), 조기부두(조선기계) 하던, 옛 부두 명칭들이 차라리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들 부두 역시 내항 축조와 북항 건설, 공장 자체의 이전, 확장 등으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 외에도 진즉에 매립으로 사라지고 명칭만 남은 괭이부리도 있었다.

차제에 만석동 원목 저목장(貯木場)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석동 해안을 일찍부터 대규모 원목지대, 목재산지로 만들었던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1938년 3월15일자 동아일보를 대략 살펴보자.

'도시 건물 건축에 필요한 재목의 수요가 늘어나 매년 인천항에 들어오는 통나무가 격증하는 상황임에도 저목장이 없어 월미도 제방 근처에 방치하는 실정이었는데, 드디어 만석동 육지와 해면에 저목장 설비가 들어서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혹 이것이 1936년에 설립된 대성목재의 편리를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로써 화수부두는 화목(火木) 중심으로, 만석동은 건축, 가구용 목재 부두로 구별이 지어지게 된 것이다.

▲ 만석동에 저목장을 설치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1938년 3월15일자 동아일보 기사./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만석동에 저목장을 설치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1938년 3월15일자 동아일보 기사./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이런 연유로 만석동의 부두는 대부분 산업부두로만 생각하는데, 실제 1950년대에는 어선부두로도 손꼽히는, 매우 융성하고 활기 넘치던 부두였다. 그 한 증례가 조선일보 1954년 6월15일자 보도에 드러난다. 이해 4월1일부터 6월10일까지 두 달 열흘 동안, 만석동 하수조합부두(荷輸組合埠頭)에 입항한 총 어선 수가 무려 1434척이었다는 내용이다.

매일 스무 척 꼴로 배가 들어온 셈이니, 물론 이것이 조기잡이 성어기 한철이었다고는 해도, 이런 정도면 대단한 어선부두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이 부두에 소재한 어물객주 위탁판매 업소만도 17개소나 되었으니 만석부두가 실로 어선부두의 중심이다시피 했던 것이다.

하수조합부두(하수부두)라는 것은 이 부두에 있던 개별 노동조합인 하수부두조합(하수조합) 명칭에 따라 시민들이 다른 부두와 구별해 부르던 이름이었다.

만석부두는 구한말 객주 전용부두가 설치되었던 유서 깊은 부두였는데, 오늘날 계속된 매립과 축대들로 옛 지형은 물론이고 그 역사조차도 묻히고, 무색하게 철따라 굴 채취선이나 낚싯배만 운항하는 초라한 부두가 되고 말았다.

인천항 부두들의 변모를 살펴보면서 문득, 흥(興)이 있으면 망(亡)이 오고, 한때의 성(盛)은 머지않아 쇠(衰)를 부른다는 영고의 진리가 여기 화수, 만석부두들에도 들어맞는 것처럼 느껴진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