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도둑이 무서워 단단한 금고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 자기 재물을 지키고자 하는 가난한 사람의 눈물겨운 자기 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열지 못하는 금고나 자물쇠는 없다고 한다. 아무리 우리가 단단하게 간수를 하고 경계를 하더라도 지킴이 열 명이 도둑 하나를 못 막는다는 말이 있듯.

누군가 단단한 금고를 열고 그 속에 든 재물을 훔치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내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재물은 도둑 맞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금고의 자물쇠를 단단히 채우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한다.

큰 도둑은 지혜롭게 자신의 재물을 지키고자 하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그 금고를 송두리째 등에 메고 도망간다. 지혜롭다는 것은 결국 큰 도둑을 위해 재물을 모아 둔 것 아닌가. 이것은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가난하지만 지혜롭게 재물을 모아둔 금고를 송두리째 들고 간 도둑, 바로 펀드이다.

1가구 1펀드라는 말이 나돌 만큼 펀드를 안 하면 참으로 우매한 사람 취급을 받아왔던 시절이 있었다.

중국 펀드며 베트남 펀드에 금 펀드, 은행의 창구는 펀드 정보로 난무했고 펀드 하나 가지지 못하고 있던 나 같은 위인은 가계를 잘못 경영하는 무능한 글쟁이 취급을 받으며 그동안 어깨를 움츠리고 살아야 했다.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어들 틈이 없었음은 물론 집 사람마저 매달 어김없이 나가던 동창회에 발을 끊었다.

게다가 그뿐인가.

독일과 일본에 유학을 나가있던 아이들을 연초에 강제로 불러들였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집을 가는 것이고 그러려면 어딘가에 취업을 해서 스스로 혼수 비용을 마련해야 하지 않느냐는 보수적이며 고리타분한 생각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귀국하자마자 환율이 급상승했다.

이즈음 친구들은 내게 미래 예측의 탁월한 눈이 있다고 말한다.

가계 경제 운영에 탁월한 달인이며 순간적 결정력에 누구도 따라갈 자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나는 요즈음 말로 그냥 가만히 있었을 뿐이고, 혼기가 다 된 딸 아이들에게 매달 꼬박 꼬박 돈을 보내 주는게 아까웠을 뿐이고, 펀드에 투자할 돈이 없었을 뿐이다.

지족불욕 (知足不辱)이라 했다.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길이 오래도록 편안할 수 있다는 뜻이다.

노자(老子)의 도덕경 44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우중문(于仲文)에게 전쟁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 두기를 바라노라며 점잖게 타이르시던 말이다.

펀드에 절단 나고 외환위기로 울고 있는 것은 기업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구제 금융이니 워크아웃이니 하는 정책적 배려가 있다.

그러나 금고를 통째로 큰 도둑에세 빼앗긴 가정이나 혼자서 꺼이 꺼이 울고 있는 기러기 아빠들은 누가 배려해 줄 것인가.

그들은 단지 잠시 동안 을지문덕 장군의 충고를 잊었을 뿐이고, 좀 더 좋은 조건의 이자 수입을 바랐을 뿐이고 내 몸 하나 희생하여 아이들의 밝은 장래를 원했을 뿐이다.

누군가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줄 것인가.

개인 펀드 손실 국가에서 전액 보상! 환율로 인한 기러기 아빠의 슬픔을 지방자치 단체에서 일부 부담! 내 스스로 기대해보았던 대통령의 신년사와 지방자치 단체장의 연두 기자회견의 헤드라인이었다.

/김용범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