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 시인/인천문화상예술인회장
인천을 비롯해 전국의 어느 도시든 중심가를 가로질러 가보면 지나칠 정도로 공간의 낭비현장을 보게 된다. 길을 걷다 보면 우리 머리 위로는 마천루같이 높은 건물이 줄을 잇는다.
건물을 지을 때 혹은 재개발을 한하거나 도시환경정비에 의하여 건물이 잘릴때 등 건물의 외장을 꽤나 비싼 마감재료를 써서 마무리 한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그 외장(외벽)은 사라져 버린다.
난무하는 간판에 의해서 말이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자. 건물이 간판 전시장인지 아니면 환경을 생각한 건물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간다. 각종 간판은 원칙과 조화를 고려해 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 규격마저도 가지각색 정말 어지럽다.
석축으로 쌓은 외벽에 온갖 색깔의 초현실주의적 작품(?)이 건물을 삼켜 버린다. 건물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간판의 밀림을 헤집고 가는 셈이다. 오로지 건물의 바깥면은 간판을 거는 용도로만 존재할 뿐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건물 외장은 왜 신경쓰는지 궁금하다. 낭비도 엄청 낭비이고 공해라면 엄청난 시각 공해이다.
간판으로 도배(?)되어 있는 그 흉물은 건물주 개인의 것이며 그가 용납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그 건물과 연속적인 공간을 이루고 있는 밖의 공간은 누구의 소유인가. 간판의 지주대가 되어버린 그 건물은 언제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과 관계한다.
그 공공의 공간 역시 흉물스러움의 연장이 되어버린다. 공공적인 공간의 개념은 무너져 버리고 우리의 미감과 배려는 이런 낭비(돈과 공간)의 원리로 음미하고 느끼는 것 없이 무뎌진다.
공간감각의 낭비는 또 다른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인천의 곳곳, 소위 전통의 거리라고 명명한 곳이나 문화의 거리 혹은 지자체에서 나름대로 지은 거리 등, 그 공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대체 어떤 전통을 말하고무엇이 문화의 거리인지 걸맞는 것 하나없이 이름 뿐, 애매모호하고 초기의 목적의식은 어디로 갔는지 무모하기 이를때 없다.
머리위로는 유럽풍의 가로등이 밤을 밝히느라 지 절로다. 물결처럼 온 색깔의 네온사인이 상점의 앞 이마를 장식하는 것도 모자라 유리창(쇼윈도우)까지 글씨를 새겨넣어 어지럽다. 새로 건축하는 건물이나 내 외장을 다시 리모델링하는 건물들 모두가 모더니즘적인 건물인지 아니면 포스트 모더니즘의 극치인지 그도 아니면 세상에 처음 지어지는 신 공법의 건물인지 모호하기 이를 때 없다.
이렇게 잡종으로 되범벅되는 것을 첨단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 특징이라 우긴다면 도리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무어라 이름붙인 거리라고 한다면 가장 첨단적인 포스트 모더니즘의 공간 이어야 하지 않을까. 공간 특유의 정체성이 어떤 상업적인 논리에서 휘발되어지고 대안없이 간다면 분명 공간학적 낭비라 아니 할 수 없다.
도시공간은 매립지가 아닌 이상 새로 확장 될 수 없다. 제한된 공간을 제대로 활용하여 이른바 문화와 공존 좀 더 나은 생활의 미학을 찾는 것이 바람직 하지 않을까.
언짢음과 불편함 또는 공해(시각적)로 이어진다면 낭비만이 아니라 감수성과 정서마저 낭비하게끔 하는 요인이 될 뿐이다. 공간의 적절한 활용, 도시의 생동감으로 이어지는 것이 경제 논리의 시장 활성화 재창출이자 진정한 미학(美學)의 도시로 가는 것 아닐까./김학균 시인/인천문화상예술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