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A) "들을 적시는 개울물이 도처에 그물망처럼 퍼져 있는, 물이 흔한 고장이었지만 다리를 통해 건너야 하는 긴내골의 시냇물은 유난히 아름다운 강이었다."
(B) "이상적인 사회는 자기 충족적인 소농촌 공동체를 기본 단위로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인 국가 기구의 소멸과 더불어 마을 민주주의에 의한 자치가 실현되는 공간이다."
(C) "나는 마침내 그리움과 슬픔으로 저린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혼자서 느릿느릿 포도주 한 병을 비웠다./ 아들놈한테 버섯전골도 얻어 먹고, 이렇게 술도 같이 하고, 좋다!" (A), (B), (C)는 현재 우리나라의 고교생들이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는 국정(國定)교과서 '고등학교 국어' 상하 권에 실려 있는 글 가운데 일부를 가려 뽑아 본 것이다.
(A)는 단편소설 '그 여자네 집'의 한 대목이다. 작가는 '긴내골의 시냇물은 아름다운 강이었다.'라고 했지만 이는 억지 표현이다. 시내와 강은 크기가 다른 내이다. 국어 교과서는 국민 언어의 전범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도처에 비문(非文)이 보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B)는 '간디의 물레'의 일부분이다. 글쓴이는 간디의 입을 빌려 무정부주의적 이상 사회를 '매우 적합한 정치 공동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10대 무역국에서 '민주주의 시장 경제'를 배워온 청소년들이 이를 어떻게 소화했을지는 매우 의문이 아닐 수 없다. (C)에서는 작중 화자가 혼자서 포도주 한 병을 비우고 교사인 아비가 고교생 자식과 대작하면서 즐거워 한다. 이밖에도 8개 단원에서는 음주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거나 조장하고 있다.
이것이 '국정 교과서'의 모습이다. 그런 판에 교육인적자원부가 무엇이 아쉬웠던지 모든 교과서를 검정화(檢定化)하리라는 소식이다. 좌우가 그 내용을 두고 맞설 것은 뻔하다. 저술가들의 수록 경쟁 또한 오죽하랴 싶다. 백년대계를 위해서도 반드시 재고해야 할 사안이다./조우성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