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룡칼럼 - 논설고문
화폐를 대신해 소금을 사용한 적이 있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허나 로마제국시대 병사 보수는 당시 귀했던 소금으로 대체했단다. 라틴어로 salary가 '소금(salt)을 사기 위해 지급하는 돈'이라 할진대 같은 어원임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소금에 얽힌 화제는 동서고금 다름이 없다. 해변소금장수가 산골에서 펼친 옛 이야기가 구수한 우리 경우뿐이랴. 중국야사엔 동물까지 덩달아 등장하고 있으니….
이야기인즉 많은 비빈(妃嬪)을 거느린 황제가 밤마다 궐내침소를 바꾸어 찾아 나서는데 어느 날 부터인가 수레를 끄는 소가 유독 한 여인에게만 발길이 잦아 의심을 샀다.
수상쩍다 싶어 뒤를 캐보게 한즉 문제의 처서 앞엔 소금이 수북히 쌓여 있어 소가 쉬는 동안 맛있게 핥고 있었다니 미상불 소도 샐러리를 좋아했던 고사다.
내가 소시 적에 접한 아프리카탐험에도 소금의 희소가치를 반영하는 대목이 보였다. 백인 인솔자가 하루 일정을 마치고 왜소한 피그미족(族) 대원에게 지불한 보수라는 것이 고작 소금 한줌 식의 배당이었다.
그나마 선심이랄까 추장 몫으로는 두 줌을 주자 그가 손가락에 소금을 묻혀 돌아가며 부하로 하여금 핥게 했다니 백인을 무안케 한 아름다운 보너스인 셈이다.
일찍이 초등학교 시절 처음 접한 인천에 관한 지식은 염전(鹽田)이었다. 비록 세월이 퇴적하여 지금은 퇴락(頹落)한 소금창고만이 쓸쓸하나 소금의 기(氣)를 유감 없이 발휘했던 왕년의 '짠 인천'을 뜻 있는 사람은 안다. "소금이 쉴까?" 하듯 변치 않는 인천기질이 새삼 그리워지는 것은 '짠 인심'이 아닌 불변의 정이 아쉬운 때문이다.
소금이 흔해진 까닭일까, 아니면 세상이 바뀌어진 탓일까? 요즘은 봉급생활자를 샐러리맨으로 표현하기보다 '사업가'티가 풍기는 비지니스맨(businessman)을 선호는 추세다. 그래서일까 '월급쟁이'이라 스스로를 홀대하는 냉소적 기운 없지 않았으니….
하지만 인구의 반이 취업자임을 감안하면 어디 감히 '쟁이'라 깔아뭉갤 수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대통령을 위시하여 비록 삼류회사의 말단직원일망정 다달이 보수를 받고 세금을 챙겨왔다면 '월급쟁이'로서 나름의 긍지를 지녀야 함이 도리다.
물론 같은 샐러리맨이면서 실력을 떠나 소득 차이가 크면 은근히 부화가 끓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누구는 죽자하고 일에 매달려도 입에 겨우 풀칠하는 터에 일부 공기업 평균 연봉이 7~8천만원에 이른다는 판국에서야 많은 이들이 답답해한다.
내처 세상을 떠들썩한 현대자동차 사태의 경우도 남들은 애쓰고도 변변히 녹(祿)을 받지 못하는 처지인데 그 야단이니 평범한 직장인의 위화감은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지 않는가. 내 돈은 건드릴 수 없는 내 돈인데 반해 공공재물은 먼저 차지하는 자가 임자 된 꼴이다.
이래서 돈이 말하는 세상에선 "자기 부모를 죽인 사람은 용서 할 수 있어도 자기 재산을 빼앗은 사람은 평생 용서할 수 없다"는 극단까지 서슴없으니 이게 어디 정상인가 함이다.
하지만 행복이란 마음의 평화에서 비롯함을 깨닫는다면 샐러리맨은 위를 쳐다보고 절망하지 말 것이며 아래를 내리 보면서 교만하지 않는 눈높이가 곧 행복의 척도다.
무릇 사람은 평소 자기가 생각해온 그대로의 인간으로 가꾸어지는 평범한 삶을 터득해야 한다. 모난 그릇에 물을 담으면 모나고 둥근 그릇에 옮기면 금시 둥그러지는 이치처럼 상호보완관계라는 차원에서 눈 높이로 겸손하면 아집으로 인한 위화감이 한결 덜어질 것이다.
소금 기 없는 식탁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소금이 없었던들 샐러리맨이라는 낱말이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당위에서 소금이 지닌 짠맛의 의미를 곱씹어 음미해보자 함이다./김경룡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