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럼- 최병관 사진가
지난해 초 방송인 L씨가 필자의 작품을 본 후 사진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사진을 배우려는 그의 신념이 확고했지만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기 방송연예인들이 그 유명세를 안고 사진이나 그림을 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필자의 생각이 잘못됨을 알고 난 후 몇 가지 제안을 했다. 유명세와 사진을 연계시키지 말 것과 사물을 정직하게 접근하라는 것 등이었다. 사진가의 길은 생각과는 달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며 항상 고뇌(苦惱)를 할 수밖에 없다. 꼭 사진을 하고 싶다면 나무관련 이야기를 만들어 볼 것을 제안했다. 나무는 인간의 스승이요 인생살이와 별반 다를 게 없으며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고 했다.
다행이 그는 나무에 해박한 지식과 관심이 많았으며 나무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게다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탓에 이해의 속도가 빨랐다. 주워진 일을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그는 진정한 프로였다. 약속한 금년 6월 서울갤러리 전시일정을 지키기 위해 밤이나 낮이나, 비 오는 날, 꽁꽁 얼어붙은 겨울 새벽을 함께 지내야 했다.
그는 사진가로써 지녀야 할 감성이 남다르게 뛰어났다.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도의 사진관련 지식과 예술혼을 함께 향유(享有)한다는 것은 오랜만의 기쁨이었다. 그의 사진은 기대 이상으로 어느 곳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하다. 그런데 웬일인지 L씨의 나무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 알 수 없는 무엇이 필자의 가슴을 짓눌렀다. 사진가로 평생 살아갈 것을 다짐했던 필자였다. 그런데 유명 방송인을 가르친다는 것이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마음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럴 때마다 세상의 온갖 풍파를 길게는 천 년을 견뎌내면서 늘 여유가 넘쳐나는 나무가 그립다.
지금으로부터 수억 년 전 지구에 나무숲이 생겨나면서부터 오늘날까지 나무는 사람들에게 모든 걸 주기만 했다. 그 어떤 대가를 요구하거나 섭섭해 하지도 않았으며, 사람과는 뗄 수 없는 소중한 관계가 되었다. 사람들에게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단 한번 원망하지 않았으며 모든 걸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뿐인가, 나무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귀한 물질이다. 쓸모없는 나무라 할지라도 죽어서 땔감으로 사용된다. 게다가 인간들에게 꼭 필요한 산소를 공급할 뿐만 아니라, 현대문명에 병든 사람들을 치유해 주는 아주 특별난 명약이 되기도 한다.
또한 나무숲에는 예술품들이 가득하며, 문학과 음악이 어우러져 늘상 인간들을 즐겁게 해준다. 나무는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잘 한다. 겨울철이 돌아오면 에너지를 적절히 유지하기 위해 나뭇잎을 모두 털어낸다. 가끔씩 찾아오는 폭풍우를 꿋꿋하게 이겨낸다. 폭풍에 찢긴 온몸의 상처를 보듬으며 길게는 수천 년을 살아간다. 비가 올 때면 몸속에 물을 저장했다가 필요한 양만큼 자연으로 되돌려준다. 사람들은 나무를 노예처럼 부려먹다 헌신짝처럼 버려도 결코 사람 곁을 떠나지 않는다. 해풍이 몰아치는 바닷가건 깎아지른 바위절벽이건 최악의 조건에서도 겸손하게 삶의 뿌리를 내린다. 나무에게는 우주의 철학이 숨겨져 있다. 나무는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베푸는 것과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물려준 겸손한 스승이다.
마지막과 시작은 어느 사람에게나 항상 가깝게 다가온다. 시작은 희망을 꿈꾸지만 마지막은 아쉬움과 두려움을 몰고 온다. 그러기 때문에 마지막달인 12월, 시작의 1월을 하나의 이어진 선으로 보면서 세상을 살아왔다. 매번 새해에는 삶의 변화, 그리고 한 가지 소망을 마음속에 담아왔다.
그런데 지금까지 허둥대며 살아왔을 뿐 무엇 하나 내세울게 없다. 분수에 맞지 않은 소망 때문이 아닐까. 해 지난 달력에는 깨알처럼 한 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어쨌거나 많은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마음은 고무풍선처럼 바람만 가득 들어 있다. 새해 첫날 고향의 뒷산에 올라 다짐을 했다. 예전의 다짐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소박한 다짐이다. "나무가 이 세상의 만물을 사랑하며 무한정 베푸는 것처럼 관용과 사랑으로 새해를 시작해야지. 그리고 나무에게 겸손한 삶의 지혜를 배워야겠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최병관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