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실 인천시 교육위원
교육인적자원부 집계에 따르면 2005년 3월부터 2006년 2월까지 조기유학을 위해 한국을 떠난 초·중·고 학생 수는 약 2만400여명이다. 이민이나 일시적인 국외 근무 때문에 부모를 따라간 사례를 제외한 순수한 숫자이다. 하루 평균 56명이 조기유학을 떠난 것이다.
초등학생 유학생 수가 8천148명으로 전체에서 약 40%를 차지 한다. 법적으로 따져볼 때 국외 이주하는 부모를 따라가는 경우 등은 교육 당국에서 승인을 받는 사례는 아니지만 자비유학은 고등학생 혹은 중학교 졸업예정자부터만 가능하다.
그나마 고등학생이 허용된 것도 2000년 3월부터이다. 인천교육청 자료에 의하면 2005학년도 4월중 3학년의 인천 전체 학생 수는 3만6천935명이었으나 2006년 4월 고교 1학년의 재적수는 3만5천492명으로 1년 동안에 약 1천443명의 학생이 고등학교 진학이 줄어든 셈이다.
2006년 고등학교 전체 학생 수의 변동 추이를 보면 4월에 10만1천888명의 학생이 9월말에는 10만929명으로, 그동안 약 962명의 학생이 인천을 떠났든 혹은 자퇴를 하였든 감소한 것이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인천의 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다.
하지만 학생 수는 줄고 있다. 역동적이고 미래 발전적인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학생 수가 늘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학생 수가 줄어가는 이유가 단지 인구 구성 요인인 고령화와 저 출산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 때문에 인천 교육을 걱정하고 있는 학부모들이 설명하는 것으로 먼저 외국어 특히 영어, 중국어 등의 습득이다. 특히 외국어 교육이 빠를수록 좋다는 그럴듯한 이유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교육 현실이다.
사교육비 증가 때문에 외국으로 자녀를 보내려는 부모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정권교체 때마다 그리고 주무 교육장관의 교체때마다 바뀌는 교육 정책, 특히 대학입시 정책에 대한 불안감이다.
언제 어떻게 입시제도가 바뀔지 모르고 입시제도가 복잡해져서 실력만으로 원하는 대학 입학에 정당한 평가받기 힘들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60년대에서 70년대까지 그래도 인천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믿고 보낼 수 있는 교육의 요람으로 전국에서 온 수많은 학생들을 잘 가르쳐 전국의 대학에 진학 시킬 수 있는 교육 특구였다.
먼 이야기 같지만 50년대에서 80년대까지 만해도 인천의 달동네가 있었다. 화평동, 송현동, 송림동 그리고 전동, 내동 등에는 먼 충청도, 강화도 등에서 온 많은 학생들이 살던 자취방 혹은 셋방이 있었다. 값싼 방값에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왔던 곳이다. 살림살이가 풍족치 못하였던 시절이지만 학생 나름대로의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하여 흔하지만 힘든 신문 돌리기 혹은 가정교사 등으로 일부 학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 사회여건이 지금과는 많이 다르지만 인천에 학생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인천 교육이 신뢰받고 믿음주고 또한 학생들에게 확실한 비전 제시와 더불어 당시에 열정적인 선생님이 학교별로 계셨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무섭고 전설같이 존경받던, 별처럼 반짝이던 길영희 선생님 같은 무수한 스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모든 것이 인천이 다른 지역보다 외지로부터 많은 학생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당시 인천의 인천고등학교, 동산고등학교, 인천공업고등학교, 제물포고등학교, 송도고등학교 등의 명문 고등학교별로 가지고 있던 학교 전통과 학생지도에 대한 열정이 있어 선배들의 권유와 인천 교육에 대한 이끌림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규모는 작았지만 공부하는 학생을 모을 수 있었던 율목동에 시립도서관이 있었고, 또한 학교별로 공부할 수 있는 소규모 도서관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통금시간이 있었던 시기였지만 가방을 들고 가는 학생에게는 관대하였던 경찰관도 인천교육에 많은 보탬을 주었던 교육도시 인천 이었다.
물론 학교 교육여건은 썩 좋지 않았지만 학교 분규가 없었던 교육의 안락한 지역이 바로 우리고장 인천 이었다. 2007년에는 인천이 인구의 증가를 앞서는 학생 수의 증가, 그리고 인천에 공부하러 오는 학생이 늘어나고, "인천에 유학 왔어요."라는 커다란 소리를 듣고 싶다./김실 인천시 교육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