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고문
'일년의 계책은 원단(元旦)'에 있고 '시작이 반'이라 했다. 개시(開市)에도 마수를 걸어야 재수 있고 처음처럼 끝맺음도 좋아야 한다는 새해에 거는 기대심리다.
자고로 우리민족은 좋은 일일랑 이웃과 함께 나눔으로서 기쁨이 겹치는 것으로 믿어 왔다. 새해 기운이 상서롭기 바람에서 누구에게나 "복 많이 받으시라"고 남의 잘되기를 비는 것이 그런 후덕한 인심의 일단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언제부턴가 덕담은커녕 남을 헐뜯다 못해 증오의 편가르기로 아등바등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런 상황에서 새해가 과연 어떤 의의를 지녔을까 미심쩍을 따름이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은 불신과 대립감정을 메울 반성의 기회여야 한다. 부적절했던 일상을 접고 심기일전의 계기로 내일을 도모함이 현 시점에서 더욱 간절한 소망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2006년과 2007년의 캘린더를 바꿔 달았다 하여 금시 어제 오늘이 달라질 것은 아니다. "하늘 아래 새 것이 있을 리 없다(구약성서 전도서)"고 하듯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니…6.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 '시작'을 강조하는 까닭은 대선의 해에 즈음하여 후보만이 아닌 유권자가 모두가 이어 패턴을 건네 줄 목적의식이 뚜렷한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해 들어 국가경영의 마스터플랜이 정권차원 뿐 아니라 대권주자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오고 있으나 대부분이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한마디로 생색만 풍기지 정작 민심을 헤아리는 공감대 형성에 미흡하다는 중론이다.
기본바탕이 서야 내딛을 방향감각이 바로 잡힌다. 경제발전은 인프라 형성에 달려 있는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급선무는 도덕적 인간상 구축이 선행돼야 한다.
나만이 옳다는 반목의 사회에서 공동선을 아우르고 갈등과 대립구조를 순화시킬 겸양(謙讓)의 미덕, 즉 헤아려 보살피는 아량을 선행하는 것이 화합구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외신은 한국인의 행복지수 순위를 세계 178개국 중 102로 꼽았고 스트레스 조사에서는 가장 많이 받는 나라로 지목한 사실을 떠올려 본다. 먹고살기에 한시름 놓은 것 같으면서 정작 인정이 굶주려 허전하다는 증거니 설사 부자나라가 된다 한들 무슨 보람을 느끼겠는가 함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 고장에 아시안게임유치가 가시화되어 내친 김에 '방문의 해'를 설정하여 문을 활짝 열어놓고 겸양의 미소가 도처에 넘쳐 흘려야 할 판국인데 말이다.
이와 관련한 하찮은 경험 한 토막…. 오래 전 런던 번화가를 거닐다 실수로 젊은 행인 뒤꿈치를 밟은 실수가 떠오르는데 상대방의 반응이 생각 밖이었다. 아차 싶었던 나의 사과 말이 미처 나서기도 전에 오히려 상대가 재빨리 미안하다 했다.
또 하나 영국은 기후 탓으로 스윙 도어가 흔한지라 문을 나설 때마다 의례 앞선 사람이 미소를 머금고 손잡이를 잡고 기다려주고 있어 마치 인정 실린 릴레이를 방불케 한다.
그것은 독선을 접고 난 오로지 남을 헤아려 배려하는 아량이다. 이 경우 비단 앵글로색슨 뿐 아닌 런던시민의 70%에 달하는 이민이 불문율로 여긴다 하던데 과연 우리는 어떤지….
남의 것은 하찮게 여기고 자기 이해관계가 따르면 한치의 양보 없는 각박한 사회풍토가 우리 주변에 도사려 있는 한 진정한 마음의 여유란 기대하기 어렵다. 언행과정에서 밀리면 도태된다는 강박관념이 극한적 이분법으로 가르는 배타심을 거두기에 남을 헐뜯는 순간 어디선가 자신을 욕하는 보이지 않는 입김을 떠올려야 한다.
숙원인 선진대열 참여를 위해 나라와 시민의 품새가 남을 헤아릴 줄 아는 사회기조가 선행돼야 시민의 행복지수가 더불어 함양된다. 이성(理性)은 만사에 앞선 덕목인 것이다./김경룡 논선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