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교수/동북아비전21이사장
연말은 약속이 많은 시기이다.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말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약속이 정확히 이루어지는 사회는 아닌 것 같다. 약속에 대한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바쁜 현대사회에 약속시간을 정확히 지킨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을 지도 모른다.
요즘에는 별로 듣지 못하는 말 '코리안 타임'. 제대로 지키지 않는 한국인의 약속시간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도 약속을 하고 나가보면 정시에 사람들이 모이는 경우는 별로 없다. 늦을 거라고 미리 말해두는 경우도 있고, 예측 못하는 교통체증을 서로 이해해주는 분위기도 있고 해서인지, 여전히 약속시간을 어기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넘어간다. 코리안 타임을 말하지는 않지만 한국인의 시간관념이 개선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약속에 늦게 오나 일찍 자리를 뜨나 모두 약속을 지킨 것이라 생각한다.
늦어도 괜찮은 약속이 있기나 한 듯이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약속은 그 어떤 것이든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직장상사나 어려운 웃어른과의 만남만이 정시에 지켜져야 하는 약속은 아니다. 약속을 어기는 것은 상대의 시간을 빼앗고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초조하게 만드는 행위로, 사과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사람이 모이는 행사를 치르기가 쉽지 않다. 참가하는 사람은 그냥 가서 행사를 즐기고 오면 되겠지만, 준비하는 사람은 고달프기 짝이 없다. 특히 참가자의 수를 알아야 하는 행사에는 참가자의 확인에 불필요한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차례의 확인절차를 마쳐도 당일 개인적 사정을 이유로 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사과는 받지만 행사는 김도 빠지고 흥도 반감하고 만다.
한국인의 행사모임에서 참가자의 수를 예측하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와 같다. 강연에도 결혼식에도 우리는 참가자 수를 예측하지 못해 낭패를 겪는 경우가 많다. 강연장에 빈자리를 채우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생하는 모습도 쉬이 볼 수 있고 결혼식장의 하객도 일정치가 않아 음식이 남거나 모자라는 등 그 낭비와 부조리가 심각하다. 우리의 행사문화는 아직도 개선될 여지가 많은 것 같다.
행사는 어떻게 치러야 할 것인지 하는 내용에 고민해야 하지만 그 보다는 몇 사람이 참석할 것인가 하는 참석자의 확인작업에 더욱 고민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약속문화의 현주소이다. 몇 번이고 연락을 취하여 출석여부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참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 행사를 주관하는 측에서는 당혹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참석자의 수에 맞춰 준비하는 행사임을 아는 이상, 화급을 다투는 그야말로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라면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누구나 피치못할 사정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미리 정한 약속을 어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딱 당하여 연락을 취해 참석이 어렵다고 양해를 구하는 것은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선약이란 그 시간에 다른 약속을 할 수 없기에 선약인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강연장에 출석하여 자리를 채우고 들어주는 것이 구성원으로서의 주인의식인 것이다. 내가 참석하지 않아 빈자리가 생기면 강연자에 결례가 될 것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구성원인 나의 참석을 전제로 한 행사에 내가 가지 않으면 성공적인 행사가 될 수 없다는 그런 의식을 가져야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참석할 테니 나 한 사람 빠져도 된다는 식의 생각은, 자칫 대다수가 빠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여러 날 준비한 측의 계획과 성의가 짓밟히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약속을 지키는 일에 개인사정을 내세우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태도이다. 공적인 일에 사적인 일을 우선시켜서는 조직이 흔들리고 사회가 무너지게 될 수도 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인간관계의 중요한 덕목이다. 강연이든 결혼식이든 친목모임이든 가야하는 것이라면 가야만하는 것이고, 간다고 했으면 반드시 가야하는 것이다. 간다고 약속해놓고 가지 않으며 사과로 해결하려 한다면 한국의 행사는 반토막짜리가 되고 마는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젠 한국에서도 약속이 정확히 이행되는 문화를 정착시켜, 모든 행사가 예측 가능한 것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인하대교수/동북아비전21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