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경제연구소장/KBS1라디오 진행자
전임 사장이 후임자를 불렀다. 회사가 어려움에 처하면 뜯어보라며 세 장의 봉투를 넘겼다. 회사를 살릴 묘책이 든 봉투였다. 아닌 게 아니라 취임한 지 6개월만에 회사 주가가 폭락했다. 신임 최고경영자(CEO)가 봉투를 열어봤다. 그 곳에는 이런 방법이 적혀 있었다. "전임자를 비난하라." 그럴 듯한 조언에 고무된 이 신임 사장, 취임 2년 후 회사가 흔들리자 어김없이 그 봉투를 열어봤다. 이번에는 "구조조정을 하라"는 묘책이 적혀 있었다. 비효율적인 사업과 제품군을 정리하고 인원 삭감 계획을 발표하자, 금새 시장이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취임한 지 4년쯤 지났을 때 또 회사의 위기가 찾아왔다. 개봉한 봉투에 적힌 회사를 살릴 비방(秘方). 그건 결코 구조조정을 다시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전해준 것과 똑같은 봉투 세 장을 준비하시오." 한 마디로 물러날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미국의 증권가인 월가에 떠도는 우스갯소리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구조조정에 대한 중대한 함의(含意)가 있다.
구조조정이란 것은 최고경영자가 임기를 걸고 단 한 번에 결행하는 것이다. 성공하면 잭 웰치 전 GE 회장의 경우처럼 영웅이 된다. 반면 실패하면 짐을 싸야 한다. 요즘 우리 기업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상시 구조조정은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늘 금연하겠다는 말은 담배를 끊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이치다.
우리 사회가 구조조정의 방법에 대해서만 오해를 하는 것은 아니다. 구조조정에 대한 본질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기업에 있어서 구조조정은 단순히 사람을 자르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회사에 돈을 벌어주지 못하는 사업이나 제품군을 제거하고, 불필요한 인력을 정리하는 일이다. 한 마디로 군살 빼기다. 다이어트도 그렇지만,
이 때 어떤 것을 불필요한 군살로 보느냐가 중요하다. 사실 각 사업부나 제품군, 그리고 감원 대상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비만 체형도 부위 곳곳을 들여다보면 다 사연이 있는 법이다.
군살이냐의 여부, 즉 구조조정 대상이냐 여부는 기업의 핵심 역량(core competence)의 일부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기업들은 경쟁력의 원천까지 포기해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아쉬워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이 바로 구조조정이다. 90년대 초반 잭 웰치가 세운 구조조정의 기준 역시 비슷했다. 그는 현재 1등이거나 조만간 1등을 할 사업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폐쇄 또는 매각해 버렸다. 그 결과 GE는 다시 초우량 일류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 예에 비춰보면, 외환 위기 이후 우리 기업들이 했다는 구조조정은 진짜 구조조정이라고 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그런데 최근 국내에서도 구조조정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요즘 제일 잘 나간다는 삼성그룹이 유통산업에서의 실패를 자인하고 철수하기로 한 것이다.
삼성물산의 유통 사업부인 삼성플라자를 애경에 매각하기로 했고, 삼성테스코 홈플러스의 지분도 영국측 파트너에 넘기기로 했다. 사실 현재 삼성의 자금력이나 저력을 생각해본다면 의외의 결정이다. 더 과감하게 투자하고 공략한다면 삼성은 유통산업마저 석권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삼성의 판단은 다르다. 그 돈을 반도체를 포함한 새로운 성장 업종에 투자하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핵심 역량에 집중하는 쪽을 선택한 셈이다.
삼성그룹이 자동차 산업에서 철수했던 예를 상기해보더라도 이례적인 방식이다. 90년대 중반 삼성그룹은 자동차 산업에 야심차게 진출했다, 과잉 투자라는 여론의 반대에 부딪쳤다. 삼성이 마지못해 자동차 산업 철수를 공식화한 것은 우리 기업 대부분이 경영난을 겪던 외환 위기 이후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진해서, 신속하게 철수를 결정했다는 점이 다르다. 거의 전 분야에서 최고의 수익을 내는 삼성이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패를 자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구조조정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실패를 인정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바로 진정한 구조조정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