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희의 생활경제칼럼 - 생활경제연구소장/KBS1라디오 진행자
유재석이라는 개그맨 출신 MC가 있다.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방송인이다. 텔레비전 채널만 틀면 그를 볼 수 있을 정도다. 그 정도면 많은 사람들이 미워할 법도 한데, 그의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다. 그에게는 안티 팬이 거의 없다.
사람들이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잘난 척 하지 않아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려 든다. 그 결과는 35세의 그는, 여전히 야한 비디오를 즐겨보는 철없는 청년으로 각인돼 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 그 자체다. 인기를 좀 얻으면 남달라 보이려는 여느 스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자학 개그를 할 때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개인의 자학은 남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반면 집단 자학은 다르다. 사회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국가 이미지를 실추시킨다. 최근의 대표적인 예가 서래마을 영아 살해사건의 경우다. 지난 7월23일 프랑스인 쿠르조씨의 집 냉장고 안에서 영아의 시신이 발견됐다. 쿠르조씨의 신고로 이 사건이 표면화 된 후, 언론의 추측 보도는 극에 달했다. 젊은 백인 여성이 등장했고, 온갖 치정 드라마가 창작됐다. 보름도 채 안 돼 우리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영아 유기 사건이 영아 살해 사건이라고 판단했다. DNA 검사를 통해 영아의 친모가 쿠르조씨의 아내로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범인 역시 쿠르조씨의 아내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그러나 언론을 비롯한 국내 여론은 경찰과 국과수의 수사 방향에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쿠르조씨 부부가 혐의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는 데다가, 프랑스 경찰이 독자적으로 수사에 착수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과학 수사 능력에 불신을 보낸 셈이었다.
그러나 9월 말 우리나라의 DNA 자료를 받아간 프랑스 사법 당국의 결론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결국 쿠르조씨의 아내는 자신이 영아 살해범임을 자백했다. 프랑스 언론은 프랑스 사회가 총체적으로 한국의 수사 결과를 불신했음을 자인했다. <르몽드>는 "세계 12위 경제 강대국인 한국을 자국에 사는 외국인이나 인질로 엮으려는 독재 국가 정도로 낮춰봤다"고까지 했다.
프랑스만 탓할 노릇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자학하면서 남으로부터 존중을 받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프랑스 사법 당국의 발표가 나온 날, 국과수의 한 관계자가 비슷한 심정을 토로했다. "사실 유전자 감식 분야에서는 우리가 프랑스보다 앞선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사망자 신원 확인 당시에서도 상당수 선진국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언론들이 서래마을 사건 초기부터 우리의 분석 결과를 믿지 않고 쿠르조씨 부부의 주장에만 더 귀를 기울인 건 그래서 더욱 섭섭했습니다." 서래마을 영아 살해 사건의 수사 주역들은 경찰의 날 모두 대통령상으로 보상받았다. 반면 우리 과학 수사 능력에 대한 자학의 주범격인 언론은 초기 보도에 대해 어느 곳 하나 반성의 글을 싣지 않았다.
집단 자학은 우리나라와 사회의 오랜 전통이다.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인들이 놀랄 정도이다. 15년 전 경 막 개장한 인천공항을 통해 미국에서 귀국한 적이 있다. 당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주한 외국인은 착륙 직전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천 공항을 둘러싼 논란이 당시까지 끊이질 않고 있었다. 해당 지역의 안개로 항공 사고가 빈번할 것이란 언론 보도에서 기술적 결함으로 연착륙 등의 불편함이 우려된다는 정치권의 폭로도 있었다. 마침 우리에 앞서 쳅락콕 신공항을 연 홍콩도 준비 소홀로 수하물 대란을 겪어야 했다. 당연히 인천공항 개장을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던 시기였다.
무사히 착륙하고 편안하게 출입국 심사를 마친 후 옆 좌석의 주한 외국인은 원더풀을 연달아 외쳤다. 공항이 너무 쾌적하고 대기 시간이 엄청나게 줄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마디를 보탰다. "그런데 왜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엄살을 떤 거죠?" 그 질문에 '우린 자학이 습관이자 전통이 돼 있거든요'라는 얘기를 하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대답도 자학 습성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오늘날 미국인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인천공항에서, 집단 자학의 습성은 결코 유재석과 같은 성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란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