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몇해 전, 모 의원이 기자들 앞에서 모 일보를 '×같은 신문'이라 해서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술에 취했다고는 하나, 성적 상대어인 '×'이라는 욕을 남성 기자들 앞에서 여성이 스스럼없이 발설했다는 것은 상식으로 사는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고도 남았다. 그러나 그것은 서곡에 불과했다. 욕을 빼면 이야기 전개가 안될 정도로 상소리가 질펀했던 '공공의 적'을 필두로 최근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타짜'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영화에는 민망한 대사들이 난무한다. 인터넷 판은 어떨까? 별로 나을 게 없다. 거기서는 '디지털 욕쟁이'가 활개를 친다. 익명의 그늘에 숨은 '언론의 자유'가 온갖 욕으로써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 "너는 왜 나하고 다르냐? "며 몽둥이를 휘두른다. 나와 다르면 간단히 적이다. 실명제도 언론의 적이다.
막가파 세상이 된 것이다. 사회의 다양성과 그 조화가 바로 민주주의의 시끄러운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씨도 먹히지 않는다. 호재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흔해빠진 무슨 주의로 무장한 전사들이나 홀리건이 등장한다. 타국 대통령도 단칼에 '×새끼'가 된다. 시청률을 생명처럼 아는 TV도 이에 빠질 수 없다. 공영 매체로서의 자존심 따위는 팽개치고 선정적 '인터넷 방송'을 인용 보도하면서 욕을 내보내고 있었다. 기 찰 노릇은 화면 자막에는 송구스럽다는 듯 '×××', '××××'라고 해 놓고, 음성으로는 욕찌거리를 다 내보내고 있었다.
국회위원으로부터 영화판, 인터넷, 방송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바야흐로 욕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지난 10여년간 급작스럽게 사회가 그 같은 천박성과 극단성에 휘둘리고 있는 것은 나라의 큰 불행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남의 '인권'과 '평등성'을 존중한다는 시대에 욕이 더욱 난무하는 것은 난해한 아이러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