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우리나라 전차는 경인철도 공사를 하기 위해 인천에 와 살던 기사 콜부란에 의해 놓여졌다. 콜부란은 한 해에 두 번씩 성묘 행차를 하던 고종에게 '전차 참묘'를 권했고, 행차 때마다 종로의 가건물을 철거하는 등 여러 폐단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한 고종이 이의 부설을 허락했다.
1898년 2월 1일 착수해 이듬해인 1899년 5월 4일 개통했다. 경인철도가 개통되기 4개월 전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1894년에 첫 도입한 인력거와 그 이듬해 들여온 자전거가 약간 있었을 뿐이어서 신기한 '탈 것'인 전차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인천에서 전차 부설이 처음 거론된 것은 그 6년 뒤인 1900년이었다. 콜부란을 제쳐놓고 몇몇 일인들이 논의했으나 불발로 끝났다. 그 후 각국지계 거주 외국인 39명이 출자한 인천전기주식회사가 1907년에 노선과 운행 시간 및 횟수 등을 밝힌 구체적인 안을 내놓았다.
이 안은 인천역-해안도로-본정(현 중앙동)-홍예문-축현역-만석동에 이르는 노선을 시내선과 시외선으로 나누고, 일반 승객뿐만 아니라 축항의 화물도 운송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도 무슨 연유에서인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광복 이후에도 인천은 전차와 인연이 없던 도시였다. 1969년에 이르러서는 서울의 전차마저도 도시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철거되고 말았다. 전차 수난 시대였다.
그러나 그것은 매연과 과속으로 숨 막히는 도시 공간 속의 전차가 '무공해의 산책'과 '느림의 낭만'까지 선사하는 매력 있는 운송 수단임을 보지 못한 단견이었다는 생각이다.
그 전차가 마침내 인천에서 부활한다. 구 활성화 방안의 하나로 중구청이 마련하고 있다. 2009년에 완공될 1단계 사업은 월미도에서 인천역에 이르는 4.6Km로 모두 250억원이 들 것이라고 한다.
기존 교통망과 어떻게 조화를 살려나갈 것이냐는 숙제가 남아 있지만, 월미관광특구의 명물이자, 중구의 효자가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