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희 생활경제연구소장/KBS1 라디오 진행자
에스프레소(espresso) 커피가 미국을 휩쓸기 시작한 것은 90년대의 일이다. 원래 에스프레소는 이탈리아어로 ‘빨리’라는 뜻에 해당된다. 커피를 고온의 물에 압축시켜 재빨리 추출하는 이탈리아식 제조 기법이다. 이 방식으로 만든 커피는 향이 살아있고, 카페인도 훨씬 많다. 에스프레소 원액에 우유와 크림이 첨가된 라떼와 카푸치노 같은 커피도 연이어 탄생했다. 이런 프리미엄 커피를 다루는 전문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도시는 물론 알래스카의 산골까지 파고들었다, 미국인들이 에스프레소를 ‘90년대의 약물(drug)'라고 이름 붙일 정도였다. 그만큼 많은 미국인들이 프리미엄 커피에 중독됐다는 뜻이다. 미국에 비해서 커피 문화가 훨씬 짧은 우리도 상황은 비슷하다. 국내에 프리미엄 커피 전문점은 90년대 후반 등장했다. 미국보다도 짧은 시간 안에 미국과 비슷한 프리미엄 커피의 천국이 됐다.
많은 직장인, 그 가운데서도 직장 여성들은 에스프레소 기반의 프리미엄 커피를 사들고 출근하는 경우가 많다. 점심을 하고나서 점심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여기다 베이글이나 케이크 한 조각을 곁들이기라도 하면, 지출액이 만만치 않다. 당초 프리미엄 커피 가격이 비싸기도 하거니와 커피 전문점들이 여러 구실로 가격을 올려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컵의 규격도 보통과 대용량에 이어 이제는 특대(grande) 용량을 고안해냈다. 커피 한 잔의 가격이 크게 비싸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또 한 커피 전문점은 공정무역 상품(FTC)을 내놓았다. 청소년 노동을 포함해 윤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제조국 커피만 사들여 만든 커피 제품이다. 이렇게 오른 원가의 몇 배나 되는 이윤이 붙는 바람에 커피 한 잔의 가격은 크게 뛰었다.
한 비공식 조사는 우리나라의 사무직 여성들이 하루 평균 9천원 가량을 커피에 쓴다고 한다. 금액 자체로는 얼마 안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의 월급이 1백5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커피 값으로만 한 달 20만원 넘게 쓰는 셈이다. 심지어 수입이 거의 없는 여대생들도 프리미엄 커피를 즐긴다. 여대생의 이런 커피 과소비 행태가 이른바 ‘된장녀’ 논란의 핵심이다. 된장녀는 과시적 소비를 일삼는 여대생들에게 네티즌들이 붙인 이름이다. 한 마디로 과소비 가운데서도 이런 과소비가 없다(단순히 소비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처지에 비해 많이 쓰는 것이 과소비다). 휴대폰 과소비에 필적할 정도다.
이런 커피 과소비 상황에서는 커피 한두 잔만 줄여도 돈이 된다. 직장 여성이 하루 평균 커피 지출액인 9천원을 매일 아끼고 저축한다고 하자. 10년간 모았을 때 얼마나 될까? 월 복리로 계산하면 3천5백80만원에 달한다. 커피만 줄여도 결혼 밑천이 떨어지는 셈이다. 사실 이런 문제의식은 프리미엄 커피 문화가 우리보다 먼저 불었던 미국에서부터 생겨났다. 미국인들은 이를 ‘라떼 요인’(Latte Factor)이라고 부른다. 라떼 한두 잔을 줄여 매일 10~20달러만 줄여도 가계 지출이 크게 줄어든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성행하고 있는 빚 다이어트(Debt Diet)에서 이 라떼 요인은 핵심 사안이다. 소소한 지출을 줄이는 데서 출발해야 빚을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 사회가 빚 다이어트에 돌입한 이유는 간단하다. 비만만큼이나 가계 부채가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미국의 빚 문제가 비만보다도 훨씬 심각하다고 본다. 비만은 감출 수 없는 반면 빚은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기 때문이다. 원래 미국은 소비 중심의 신용 사회다. 대부분의 가정이 빚을 많이 쌓아두는 편이다. 그런데도 각 가구당 우리 돈으로 1억원을 훌쩍 넘는 현재의 수준은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우리의 가계 부채 역시 사상 최대치를 기록중이다. 지난 6월 말 현재 5백46조원으로, 가구당 3천4백만원이 약간 넘는 액수다. 단순 비교로만 치면 미국에는 훨씬 못 미친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미국과 우리나라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다. 우리 경제 규모나 안정성, 그리고 우리 가계의 구조를 고려하면 정작 빚 다이어트가 필요한 것은 우리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최근 가계부채가 급격하게 늘어난 이유는 부동산을 사들이기 위해 대출을 늘려서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는 오르고 부동산 값이 떨어진다면? 당장 내 주변의 라떼 요인은 없는지부터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