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마’(magma)의 분출을 방불케 했던 5·31 지방선거의 여진(餘震)은 엄청난 지각변동을 남기고 가라앉았다.
 지역일꾼 선발차원을 넘어 중간평가 성격을 띤 총력전이었던 만큼 이제는 갈라진 민심을 추스를 대국적 화합을 위해 여야 모두 겸허한 반성이 나서야 할 시간이다.
 세상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이번 선거결과로 미래 정치생명을 가늠하기에는 이르다. 승자는 자만을 버리고 지지자의 의중 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패자 또한 외면당한 민의를 돌려 잡기에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인내를 거칠 때 비로소 변함없는 신뢰를 누릴 수 있다.
 매사 유용한 마무리는 반성할 줄 아는 자에게 절호의 기회가 돌아오는 법이다. 과연 지역사회에 공헌할 일꾼으로 자처하기에 군색함이 없던 가를 무시로 반문하고 보완하는 자세야말로 국가사회는 물론 본인의 장래에 힘 실어줄 덕목인 것이다.
 그 점에서 함량미달의 일부 후보자들이 밑져야 본전, 출마이력이나 챙기려는 심보로 클로즈업했던 얼굴벽보가 지금도 방대한 홍보물 쓰레기 가운데 널려 있어 안쓰럽다.
 이왕 벽보에 말이 미쳤으니 길목 요소건물에 내 걸렸던 대형 후보인물 현수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고층건물 벽면을 온통 뒤집어 쓴 후보초상은 평양, 베이징서 마주침직한 장관을 자아냈던 한편으로 가려진 건물 안 거주자들이 오죽이나 답답했을까 싶었다.
 비록 국가대사 홍보차원에서 이해할 일이기는 하나 흔치 않은 사례로서 차제에 대형현수막의 ‘큰 얼굴’이 과연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이상적 인물척도인 가라는 의문을 품는 까닭이다.
 얼굴은 마음의 크기와 반비례한다. 얼굴을 크게 내세우면 그만큼 마음이 옹졸해지니. 정작 크게 내세워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활짝 열려진 꾸밈없는 마음의 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득 떠오르는 것은 ‘큰 현수막 얼굴’과 견주어지는 왕년의 학교 교과서에서 낯익은 다니엘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인 바 대강 이러했다.
 어머니가 되뇌어주던 마을전설처럼 해질 무렵 노을진 산비탈에 드러난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인이 그 언젠가 나설 것이라는 믿음은 소년 어니스트를 떠받드는 평생을 걸은 신조다.
 때문에 뒷날 성공을 거두고 마을로 돌아온 세 명사(재력가·장군·정치가)를 통해 선망의 대상이기는 하나 그들 얼굴에서 만인의 사표(師表)가 될 기품을 찾아 볼 수 없어 실망한다.
 이점으로 미루어 시대환경은 다르나 금과 권력이 조성한 세도의 상징성은 고금동서 일맥상통함을 읽는다. 여기서 얻어지는 교훈은 큰 인물이 쉬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실망하지 않고 스스로도 바르게살기를 게으르지 않는 소년이야말로 ‘큰 바위 얼굴’이 아니겠는가 하는 계시다.
 현안의 선거는 끝났을망정 뒷날 내내 따라 붙을 검증과제 환기에 게을리 말아야 할 일이다, 여야 정치 일꾼들은 가식과 입에 발라 맞춘 그간의 공약(空約)에서 벗어나 다시 챙겨 넘을 한치 흐트러짐 없는 ’매니페스토’ 실천자로서 거듭나기에 초심을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 했다. 선거는 끝났으나 또 다른 선거가 기다린다. 이에 변함 없이 겸손과 양보하는 자세로서 울어나는 덕망이 곧 큰 인물에 이르는 길임을 비유함이다.
 말미에 이와 관련하여 사족(蛇足)을 부치자면 우연치 않게 충북 음성소재 “큰 바위 얼굴 조각공원”이 있음을 건네 들었다.
 영역이 방대하고 등장 ‘얼굴’이 동서고금을 아우르다 보면 행여 인물선별의 졸속과 작품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지레짐작 없지 않으나 아무튼 큰 배움터임에는 틀림없다. 세계인의 가치관이 다양해져 최근 세계유명 밀랍인형 박물관인 ‘마담 루소’에 한류(韓流) 원조 배용준이 등장하는 작금의 추세이라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가 보다.
 조각공원 ‘큰 바위 얼굴’을 보는 나 같은 노인의 눈과 티 없이 맑은 소년 어니스트의 시각간에 행여 괴리가 없을까 싶어 한번 현지에 찾아 나설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