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법회 인천 연수중 교장 (한글학회 정회원)
어느 전통 있는 학교에서 오랜만에 펴낸 두툼한 교지 한 권을 보내왔다. 바쁜 중에 대충 읽어보았는데 편집이나 제본도 요즘 감각에 맞게 잘 했고 내용도 알차게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글짓기대회의 작품을 싣는 난에서 잘못을 발견하였다. 그 한 꼭지의 제목이 ‘교내 백일장대회’인데 이것을 한 면에 큰 글씨로 적은 것이다.
‘백일장(白日場)’은 원래 조선 시대에 각 지방에서 유생들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 글짓기 시험을 보는 행사였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요즘도 각종 글짓기 대회 이름을 ‘○○ 백일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백일장’이라는 말 자체가 글짓기 대회를 뜻하므로 ‘교내 백일장대회’라고 하면 ‘백일장’과 ‘대회’가 겹치는 말이 된다. 이 말은 ‘교내 백일장’이라고 쓰던가 아니면 요즘 쉬운 말로 ‘교내 글짓기 대회’라고 써야 맞는다.
또 줄넘기 대회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에 대회 장소가 ‘시립도원실내체육관’이라고 안내한 것을 보았다.
여기서 ‘체육관(體育館)’이란 말에는 ‘집 관’자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실내’란 말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체육관에서 운동을 한다고 하면 당연히 ‘실내’이며, 야외가 아니기 때문에 눈비를 맞을 염려가 없는 곳이다.
그러니까 이 초청장에는 대회 장소를 마땅히 ‘시립도원체육관’이라고 해야하며 고유명사인 체육관 이름에 ‘실내’라는 말이 아예 들어 있다고 하면 체육관 이름을 고쳐야 한다.
우리가 말글 생활을 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겹치기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친구와 약속을 할 때 “일요일 날 주안역전 앞에서 만나자.” 라고 말하기도 하고, 중국음식점에서 자장면값 받으러 온 젊은 친구는 보통 “식대비 받으러 왔어요.”라고 말한다.
위에서 ‘역전(驛前)앞’은 ‘앞 전’자가 겹쳐서 틀린 말이지만 ‘일요일 날, 월요일 날…’처럼 ‘날 일’자가 겹친 말은 우리가 관습으로 써 왔기 때문에 허용하기도 한다.
‘식대비(食貸費)’도 ‘식대’ 또는 ‘식비’라고 해야 맞는 말이지만 쉽게 ‘밥값’이라는 토박이말을 쓰면 틀릴 염려도 없다. 유식한 척 한자말 쓰려다 실수하느니보다 아예 쉬운 말을 쓰도록 고쳐나가는 것이 우리말 바르게 쓰기 운동의 취지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담뱃값, 전기요금값도 오르게 됐습니다.”(2005.11. 27. ㅅ방송 8시 저녁뉴스)라고 말하기도 한다.
역전 앞, 식대비(食貸費), 전기요금값, 일요일 날, 처갓집, 외갓집, 상갓집, 낙숫물 따위는 모두 우리가 흔히 쓰는 겹치기말들이다.
이런 겹치기말 가운데는 오랜 습관에 의해 굳어진 것으로 표준어로 인정하는 것들이 꽤 많다. 위에서 ‘역전 앞, 식대비, 전기요금값’을 제외하고는 모두 허용되는 것들이다.
‘낙숫물이 떨어진다.’와 같은 문장은 ‘낙수(落水)’에서 ‘떨어질 낙’자가 뒤에 나오는 ‘떨어진다’와 겹치며, 한자 ‘수(水)’는 토박이말 ‘물’과 겹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표현이 맞느냐, 틀리느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우리말에서 ‘낙수한다’는 말은 오히려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낙숫물이 떨어진다’는 필요 이상의 겹치기 말로 된 문장이지만 틀린 문장은 아니다.
일상 언어 생활에서 누구나 우리 말글을 실수 없이 완벽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나라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바르게 쓰도록 노력하는 의지가 중요하다.
이런 글을 쓰다보면 구체적 예를 들기 위해 주변의 특정 단체나 개인의 잘못된 말과 글을 꼬집는 일들이 자주 생기는데 이해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