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이면 멜 대(天秤) 채반에 얼어붙은 거름을 창으로 쪼아 담던 중국인이 회상된다. 뒤로는 ‘×되놈’이라 비아냥대도 정작 맞대 부를 때는 부지중에 ‘대국(大國)사람’이라 했으니. 얼마 전 중국에 가서 느낀 감회는 ‘되’(오랑캐)와 ‘대국’이미지가 뒤섞인 감회였거니와 무진한 화제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 없어 두 지역을 골라잡아 표제의 상징성에 근접하면 이렇다. 근자에 중국 역시 우리 인기사극 ‘大長今’에 사로잡혔거니와 이를 방영중인 후난(湖南)위성TV 소재지 일대가 바로 기암절벽 천하명승지 장가계(張家界)라는 첫 번째 실마리다.
도연명이 읊은 무릉도원(武陵桃源) 그대로 태어나 백살이 되어도 이곳을 보지 않으면 헛산 것이란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내처 1,300m 험난한 “황석채(黃石寨)에 오르지 않으면 장가계에 못 온 셈”이란 고사를 80노인이 따랐으니 이만하면 저승사자께 면목이 서지 않겠는가?
장가계 관광객 90%가 한국인임을 뒷받침하듯 어디 가나 한글 간판이 낯설지 않고 왕년의 수호전(水滸傳)산채로 어울림직한 오지에마저 한식집 ‘위하여’와 ‘발해호텔’ 등이 성업중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원貨가 제 대접받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있을 성싶지 않다. 현지 아녀자가 소리소리 ‘천원 천원’ 도부치는 소리는 남대문시장을 방불케 하며 그나마 1만원 권은 ‘귀하신 몸’이라서 구전을 챙기려는 환전상의 성화를 피하기 버거울 정도였으니.
실크로드가 인접했던 비단생산지라 상설전시장에선 우아한 패션쇼가 열리는가 하면 한편으로 산간주민이 도시로 나온 폐가가 약삭빠른 한국인의 財테크에 오르는 오늘의 실정이다.
중국은 55개 소수족에 자치권(區 州 縣)을 부여하여 우회적 동화정책을 쓰고 있거니와 장가계 ‘투자족(土家族)자치현’만큼은 가위 한류(韓流)권에 놓여 있다하여 과언이 아니다.
다만 교민의 조직구심력부재와 일부 관광객의 졸부근성에 대한 비판시각이 없지 않아 한류 아닌 한류(寒流)가 경계된다. 외진데서 마주친 현지청년이 길을 비켜주지 않던 매서운 눈초리와 관원의 필요이상의 깐깐한 대응만으로도 그들의 속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지 않았다.
두 번째로 베이징(北京)은 이질적 문화인습과 상반된 이념을 적절히 융화 포용하는 스케일 큰 도시로 비춰졌거니와 이는 현 집권층의 일관된 정치철학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의 전략에 따라 쉽게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던 작금이다. 어디 가나 거지가 손을 벌려왔고 비록 불결한 화장실문화를 한국부터 벤치마킹 할망정 실속을 위해 허름한 치장 속에 비단 옷을 감추기를 마다 않았다.
여담 같으나 평양시민의 깔끔한 매무새와 ‘아리랑 공연’에서 보여준 화려한 치장에서 중국을 통해 한 수 배워야 할 대목은 가식은 도금(鍍金)처럼 오래 가지 않는다는 교훈이다,
이윽고 천안문광장에 서니 89사태 때와는 다른 인파로 차있었고 피로 물들인 문화혁명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모택동 초상은 여전하다. 이는 자금성 정전인 태화전(太和殿)에 걸린 현판에 한자와 함께 만주문자(Manchu script)가 나란히 적혀 있는 점과 맥락을 같이 한다.
모택동의 하자를 ‘대약진운동’ 평가를 통해 재정립하는 점이나 이방정복자 淸의 변방어를 그대로 살려 둔 통이 큰 정치가 잠시 우리 근시안적 과거사 정리와 비교되어 스쳐갔다.
바야흐로 중국이 빛을 드러내기에 이른 것은 허세를 자중함으로써 일군 힘의 결집이다. 내가 70년 7월 동남아시아 일원을 돌며 그 해 4월 중국 첫 인공위성(東方紅)성공에 따른 감상을 화교에 물었더니 당시 이념을 달리했건만 동족으로서 긍지를 느낀다는 회답이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북경은 2008 올림픽 준비로 온통 파 헤쳐져 때아닌 황사현상을 방불케 하건만 유인우주선(神舟) 성공의 경사가 겹쳐 시민표정은 더없이 밝고 자신에 차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귀로 텐진(天津)비행장서 인천은 서울 가기와 오십보 백보의 시간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에 이른다’ 하였거니와 인천은 관광통로에 머물지 않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중국을 여는 관문이라는 인식아래 특히 화교자본유치에 관심과 배려에 인색치 말아야 한다.
중국이 초 대국으로 용트림하는 마당에 그들 알기를 고작 ‘회충김치’ 만들기 수준의 ‘되놈’쯤 업신여긴다면 미구에 우리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우를 면치 못하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