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갑영 인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언젠가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명창이 소리칠 때 머리를 스쳐간 것은 바로 항아리였다. 비록 도자기처럼 안방에서 대접을 받는 형편은 못되지만 그 넉넉하고 소박한 자태는 볼수록 정이 간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항아리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구멍들이 있어서 특히 음식을 발효시키거나 저장하기에 좋았던 것이다. 그런데 항아리는 그릇으로만 각광받은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습도 항아리를 닮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항아리는 대부분 배가 불룩한데,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중산층이 많아져서 사회가 안정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항아리가 아니라 점점 허리가 잘록한 표주박으로 바뀌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화두는 ‘양극화’이다. 주변부국가들의 모범적 사례로 추앙되었던 우리경제는 1997년 경제공황을 통과하면서 한층 가파르게 양극화되어 사회통합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지방, 첨단과 재래, 제조업과 서비스 등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소득과 소비가 극심하게 양극화되면서 사회는 빠르게 분열되고 있는데, 800만이 넘는 불안정고용노동자들, 400만에 달하는 절대빈곤층들, 360만의 신용불량자들, 그리고 700만이 넘는 빈곤층 가운데는 이른바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희망이 사라지는 세월이다.
양극화의 폐해
이러한 양극화가 가져오는 사회적 병리현상은 심각할 수밖에 없다. 사회전반에 불안심리가 확산되는 것은 물론 이혼율이나 범죄율도 높아지고 있다. 좌절과 절망의 늪이 한층 넓어지면서 사회적 갈등이 첨예해지고, 급기야 정치권력에 대한 불신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도 후퇴할 수 있는 것이다. 표주박의 한쪽에서는 웰빙(well being)을 외치며 명품을 쫓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서구와 달리 실업과 빈곤 같은 경제적 곤란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5분마다 한명씩 자살을 시도하고 45분마다 한명이 자살로 생명을 버리고 있는 현실이다.
양극화의 폐해는 지배세력들도 위험을 느끼는 수준이 되었다. 우리사회를 중산층이 두터운 ‘항아리사회’라고 선전했던 언론들은 재빠르게 ‘표주박사회’가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얼러대고 있다. 미국이나 영국, 일본에서도 중산층이 붕괴되고 불안정고용이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남들도 다 겪고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둘러댄다. 그러면서 양극화는 산업사회에서 지식사회로 경제패러다임이 변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인데, 전문적 지식을 습득한 중심노동자들에 비해 뒤처지는 주변노동자들을 위해 다양한 직업교육의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고 친절을 잊지 않는다. 양극화의 원인을 노동자들의 게으름에서 찾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원죄를 씻겨줄 세례를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의 진실이라면 이론은 무엇에 쓴단 말인가! 우리 사회에서 양극화는 1997년 경제공황이후 신자유주의로 가속되고 있지만, 자본주의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원죄’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에서 보듯이 자본의 세상은 한쪽에서 자본축적이 일어나는 반면에서 다른 한쪽에서는 빈곤축적을 가져온 것이다. 따라서 양극화는 성장을 통해서 극복해야 한다는 부류들은 차지하더라도, 한가하게 ‘동반성장’이나 ‘참여복지’타령에 장단을 맞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표주박은 전통혼례의 합근례 즉 신랑과 신부가 한 표주박을 둘로 나눈 잔에 술을 마시며 화합을 기원하는데 쓰였지만, 표주박사회는 자본주의의 원죄를 씻겨줄 ‘세례’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