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아파트 인근에는 실개천 따라 나선 산책로가 뻗어 있다. 갈대꽃 바람을 일으키는 물가에서 피라미 겨누는 백로와 마주치면 지친 심기가 한결 맑아지는 기분이다.
이왕이면 밤하늘을 수놓는 별무리까지 아우러진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자정 넘어 찾아 나섰으나 밝은 가로등불은 소박한 기대마저 여지없이 가려 버렸다.
일련의 잠재의식 때문인지 나이답지 않게 별(星) 꿈을 자주 꾼다. 현란한 성운(星雲)은 장엄한 오케스트라로 번지고 북두칠성 끝자락에 잡힌 북극성은 유년시절 본 그대로니.
별 꿈을 별난 꿈으로 웃으면 할 말이 막힌다. 다만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이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던 ‘아리랑’과는 달리 요즘 그렇듯 정감 어린 동화소재가 없다는 아쉬움이다.
무수한 창문(특히 아파트)을 통해 비치는 도시불빛은 별 만큼이나 많건만 정작 그 안에서 이웃이란 매양 스쳐 가는 이방인을 방불케 하는 사방이 단절 된 아파트 문화다.
평소 같은 동(棟)은 고사하고 한 라인 아래위 누가 살고 있는지조차 무심한 것이 일반적 추세가 아닌가 헤아려진다. 무시로 스쳐 지나가는 통로나 한 방향으로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애써 외면하는 표정관리가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반면 비유컨대 일단 밖에 나서면 누구보다 ‘통일’ ‘한마음’을 소리 높이는 위인이 정작 눈앞에 보이고 손닿는 이웃과의 평범한 공존의식에는 소홀한대서야 될 법한 일인가.
그건 이쯤하고 나는 ‘로열’과는 거리 먼 아파트 3층에 살고 있다. 바로 여학교 뒷들과 어린이 놀이터를 사이 두고 있어 ‘별 기운’을 많이 누린다고 자랑하면 억지춘향이라 할 것인가?
아니다. 색색들이 아름다운 꽃밭을 별자리에 비길진대 꽃보다 싱그러운 새싹이라 할 그들과 무시로 접할 눈높이 위치는 값진 프리미엄을 지녔다 할 것이다.
보기 하여 연휴주말 시간공간여유에서 비롯한 자녀와 함께 나서는 아파트 놀이공간풍경은 풍진세상 물정 이 때만 같아라 싶게 화기애애하다.
간드러진 웃음꽃을 날리며 회전대가 돌아간다. 그네를 미는 엄마는 높이 오르는 딸을 통해 소녀시절의 꿈이 되살아 날 것이고. 아들은 축구공을 멋지게 넘기는 아버지의 딴 모습에 신뢰를 보냈을 것이다. 중년부부가 숨겼던 배드민턴 실력을 과시하고 나면 비록 별은 뜨지 않는 밤일망정 등불아래 뒤뚝뒤뚝 인라인 스케이트를 배우는 진지한 표정이 잡힌다.
날린 바람개비가 나뭇가지에 걸려 애 태우는 어린이에게 달려가 땀 범벅이 되어 고마워하던 그와 정다운 시선을 마주칠 수 있었던 것도 눈 높이 공간이 누리는 특전이다.
그뿐인가. 언젠가는 몰지각한 어른이 감 가지를 꺾고 꽃 사과 따는 무딘 신경에 호통친 것도 3층 창문의 다목적 용도다.
폐 일언하면 하늘 별자리 운행이 정연한 것처럼 땅에서도 큰 별 작은 별의 정다운 너와 나의 정다운 거리를 이어가는 것이 인정을 메마르지 않게 하는 요체라는 것이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읊자니 내가 어렸을 적 은하수가 고왔던 북녘 땅 고향을 떠오르건만 정작 나보다 젊은 나이의 얼굴이 60년 전 모습으로 겹쳐 깜빡이니.
아무리 고개 저어도 지금은 저승별이 되었을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며 99년 1월 금강산 한하계(寒霞溪) 눈길에서 제를 올렸던 기억이 새롭다. 이래저래 마음 재우고자 먼 나라 낯선 고장별을 찾아 나서기 하루 앞서 미리 띄워 보내는 가을 한낮의 별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