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창용 칼럼니스트, 전 인천시의원
강정구 교수의 설화(舌禍)는 끝이 없다. 이번엔 한 정세토론회에서 지난 46년 여론조사 결과 공산.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가 77%였던 점을 거론하며 “당시 조선사람이 원하는 것이면 응당 그 체제를 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6.25는 통일전쟁”이라며, “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달 이내에 끝나고 통일이 달성됐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실제 지난달 한양대 강연에서도 “자본주의가 흡수 통일한 독일만 통일이고 베트남과 예멘은 통일이 아니냐”며 하나로 합치면 통일이지 사회주의식 통일은 통일이 아니냐는 논리를 폈다.
“사회주의식 통일에 볼모”
강 교수는 줄곧 사회주의식 통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듯한 발언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소신에서라기보다 경도된 이념의 볼모가 된 탓이 크다고 본다.
1946년 미군정청이 실시한 사회체제에 대한 선호도 여론조사 결과, 자본주의 14%,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7%등으로 나타났다. 틀림없이 좌익이념의 선호도가 77%에 달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같은 좌익이긴 하지만 추구하는 정치지형은 엄연히 달랐다. 두 체제는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고 친일분자 처벌이나 남한단독정부수립 반대 등에 대해서 입장이 같았다. 그러나 토지개혁에 있어 공산주의는 급진적인데 반해 사회주의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탓에 사회주의자들은 인민(국민)민주주의 사회체제를 옹호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자연 공산주의는 당시 소비에트가 막후에서 지원하던 북한체제와는 궤를 같이했다. 반면 사회주의는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 이념으로 수용된 이래 해방직후 조선사회에서 변혁의 동력으로 널리 유행했다. 특히 자본주의가 보수적 민족주의자나 친일협력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따른 반발도 유행을 크게 부추겼다.
이 같은 유행은 조선인민공화국 결성으로 진가를 발휘했다. 해방 공백기 조선의 치안유지와 행정을 담당하기 위해 발빠르게 나선 이가 온건사회주의자인 여운형이었다. 그는 해방이 되자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성하여 사실상 정부기능 수행에 나섰다. 하부 지방조직인 인민위원회는 1945년 11월 당시 3개군, 13개면을 제외한 남북한 전역 모든 행정단위에 설치되었다. 해방에 따른 기대심리와 토지의 무상 분배 등 조선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강령이 어우러져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결과였다. 일례로 경북 영양군 경우, 군민 80%가 인민위원회 소속이었을 정도였다. 곧 ‘인민공화국’은 그동안 억눌린 조선인의 한을 해결하는 수단처럼 상징되었다. 지도부는 일부 우익 인사를 비롯하여 소수의 사회주의자 등 주로 비공산계열이 이끌었다. 박헌영이 배제된 것처럼 공산주의자는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조선인민공화국은 조선인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1947년 7월 조선신문기자회가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장차 수립될 임시정부의 국호로 ‘대한민국’이 24%인 반면 ‘조선인민공화국’은 70%, 정권형태로 ‘종래 제도’가 14%지만 ‘인민위원회’는 71%나 차지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사회 공산, 다른 체제”
해방직후 조선인들의 희망은 자력에 의한 정부수립이었고, 조선인에 의한 사회체제였다. 이런 여망은 조선인민, 즉 조선인 대다수의 이익을 대표하는 독립된 정부인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나타났다. 이 모두가 미 점령군의 도착 전후시기의 일이긴 하지만 북조선이 추구하던 사회주의 체제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런 탓에 이 시기 여론조사는 당연히 ‘사회주의’였고 정부형태도 조선인민공화국이었다. 강 교수는 당시 ‘사회주의’가 ‘공산주의’와 엄연히 다름에도 이를 묶어 마치 국민 대다수가 오늘의 북한 사회주의식 체제를 선호했다는 것으로 호도하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역사해석이 아닐뿐더러 필요에 따라 역사적 사실마저 윤색하려 드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