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신의 경희대 교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예술이 세상을 바꿉니다’. 이는 지난 9월 29일 서울에서 열린 제1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출범식에서 내건 캐치프레이즈다. 1972년부터 예술분야의 지원사업을 주관해 오던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체제가 11인의 위원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체제로 전환되는 데 그 변화를 알려주는 문구로서 충분히 설득력 있는 내용이다. 필자 역시 위원의 한 사람으로 이 캐치프레이즈를 선정하는 데 일임을 하였지만, 실제로 이 문구는 필자가 오랜 동안 지녀온 신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술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예술이 세상을 바꿉니다’라는 표현에는 일차적으로 확장된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 담겨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술을 떠올리면 그 사회적 역할은 분명하게 와 닿지 않는다. 실제로 예술에 대한 정의는 문화예술진흥법(제1장 제2조)에 명기되어 있다. “문화예술이라 함은 문학, 미술(응용미술을 포함한다), 음악, 무용, 연극, 영화, 연예, 국악, 사진, 건축, 어문 및 출판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예술의 장르를 나열한 것일 뿐이고, 이 정도로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가늠하기 어렵다.
오히려 예술이 어떤 인간을 목표로 하는가로 이야기를 풀어보면 어떨까. 어쩌면 예술이란 인간의 창의성을 살려주는 것, 혹은 창의성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창의성이란 특정한 예술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창의성이라는 것도 발상의 문제, 주의력의 문제라고 한다면, 그 또한 누구의 점유물도 아닌 것이다. 필자는 자주 예술가를 정의할 때 ‘주의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 주의력은 아주 작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엄청난 논리적 비약을 범하면서 말이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가을 바람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 도시의 보도 블럭 사이로 삐져나온 이름 없는 풀잎의 생명력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일, 이런 것이 예술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그런 주의력을 갖게 되면 실제로 누구라도 사람에 대해 무례하지 못할 것이다. 장애인에 대해서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도, 그리고 어린이, 동성애자, 여성, 소외계층 모두에 대해서도 말이다. 사람마다 갖는 개개의 차이, 또 사람과 사람이 모여 만든 공동체와 사회가 갖는 문화적 차이에 대해 결코 무례함을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른 사람에 대한 존엄은 곧 자신에 대한 존엄에서 시작하는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자신을 소중히 하는 마음이 바로 이 주의력에서 비롯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의 창의성을 모태로 문화 개념이 제안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사회 통합을 이루기 위한 문화적 접근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문화예술교류를 통한 남북교류의 효과, 여성예술을 통한 양성평등에 대한 인식의 확산, 한류를 통한 한일교류의 효과, 청소년 예술 교육으로 가능한 청소년 정책의 효과, 미술치료 및 연극치료 등을 통한 예술치유의 가능성, 소수자 문화의 이해를 위한 행동주의 예술의 효과, 도시 및 지역문화 공동체 수립을 위한 공공미술의 효과, 지역문화 균형발전을 이루기 위한 예술경영의 효과를 보라. 이렇게 예술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은 누구에게나 잠재한 창의성을 일깨우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회복한 창의성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원활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술을 삶의 차원에서 새롭게 결합하는 일이 필요하다. 최근 자주 거론되는 문화예술교육과 같은 실천은 그 새로운 결합 중 하나가 된다. 학교에서의 예술교육을 강화하는 일, 박물관과 미술관, 예술극장, 도서관과 각종 문화기반시설 속에서 새로운 예술프로그램을 기획하여 관람객과 함께 나누는 일, 철거민촌으로, 농촌으로, 폐광촌으로, 산간으로, 감옥으로 예술이 찾아가 함께 사회적 질서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일,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명제는 하나의 실험이자 모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일깨우는 일이라는 점에서 결코 어렵지 않은 실험이고 모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