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꽃 피는 봄이 오면’을 생각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추석을 맞이하며 “희망을 갖자, 나아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국민들은 왜 이 말을 거꾸로 받아들이는가? 대통령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보다는 즉물적으로 불신하거나 빈정거리며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나라 국민 치고 경제부총리의 말처럼 내년 추석에는 올해의 어려웠던 모습을 추억처럼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지금 실제로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 국민들은 많지 않다.
그것은 왜일까? 최근 들어 우리나라 국민들이 무섭게 빠른 속도로 이기적인 인간으로 변모해 버린 까닭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인간생활은 ‘기브 앤드 테이크’의 원칙아래 이루어지고 있다. 무엇을 줄 때는 받는 것을 기대하고, 받을 때에는 줄 것을 생각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의 원칙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반면에 기대하지 않는 인간, 아무도 신용하지 않는 인간, 그리하여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인간들만 날로 늘어나고 있다.
이를테면 필자가 최근 읽은 한겨레신문의 어떤 기사에 대해 한 독자는 이런 의견을 덧붙여 놓고 있다. “온 나라를 깽판으로 만들고 민심 이반시키고 내 몰라라 하는 노무헌 !! 정녕 노사모들 소리만 들리는 교주로만 남으려고 하는 것인가!! 애써 민심을 외면하면 그 결과는 말을 안 해도 잘 알 것이니 두말하지 않겠다.” 이렇게 막말로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기사에 대해서는 “세계 최악의 범죄 발생국이며 인권유린국인 미합중국의 노골적 군사작전에 다름 아닌 북한붕괴 목적의 인권법을 상정시켰지만, 남북 내외동포들이 심각한 우려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제의 오만한 한반도 분열횡포, 분단고착화 책동에 대한 전민족적 저항과 비판이 솟구칩니다.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각오로 미제의 야만적인 한반도 예속화 시도에 대하여 민족공조의 힘으로 대항해야 할 때입니다”라는 식의 감정적 민족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손쉽게 만날 수 있는 이런 말들 속에는 타인과 대상에 대한 증오의 감정들이 배어 있다. 분노의 순수성과 단순성을 넘어서서 이제는 습관화된 증오로 변모해 버린 감정들이 인터넷 게시판을 온통 도배질하고 있는 게 요즘의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글들을 보고 있으면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마땅히 진정되어야 할 분노가, 당리당략에 마구 뒤흔들리는 정치판의 영향을 받아, 증오의 형태를 취한 복수심으로 발전할까봐 두려워진다.   
분노는 순수한 감정이긴 하지만 돌발적인 감정인만큼 방법적 지성에 따르는  이성적인 판단과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증오는 대상에 대한 성찰과 이해의 과정을 생략해 버린, 고착된 분노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감정이다. 그런데도 작금의 우리 역사는 몇 차례의 선거와 통치자의 교체를 거치면서 그놈이 그놈이라는 불신감과 함께 믿을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이기적 태도를 만연시킴으로써 증오의 감정을 양산하고 있다. 상대에 대한 이해를 주고받는 관계가 사상된 이런 감정의 난무는 민주화에 따른 필연적 기획비용으로 간주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우리사회가 건강한 이성적 사회가 되자면, 타인의 말과 행위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할 경우 반대의 감정을 표출하기 전에 먼저 절도 있게 숙고하고 회의하는 절차를 거치는, 교양인이 다수를 차지해야 한다. 타인의 말과 행위를 무조건 지지하거나 부정하는 이기적 독단가가 되는 것은 쉽지만 방법적 사고를 통해 이해나 비판에 도달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절도 있는 회의나 지지를 보여주는 교양인은 드문 반면, 회의할 힘을 잃어버린 교양인, 더 이상 방법적으로 숙고하지 않는 교양인은 많아서 나라의 장래가 심히 걱정스럽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비록 정치가 아무리 믿을 수 없는 행태를 보인다 해도, 우리는 미키 기요시의 말처럼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모든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서구의 사회계약설은 상상력이 없는 합리주의의 산물이다. 사회의 기초는 ‘계약’이 아니라 ‘기대’이다. 사회는 기대라는 마술적인 구속력 위에 세워진 건물이다”라고 말이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라도 가지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은 앞으로 얼마나 더 가난해지고 괴로워질 것인가!
    홍정선 문학평론가/ 인하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