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달 남짓 동안 우리 국민들은 이 산 저 산에 걸쳐있는 조상 묘에 대한 대대적인 벌초작업을 끝냈다. 이어 그저께는 온 국민들이 한가위 추석을 맞아 성묘까지 다녀왔다. 해마다 이처럼 조상을 찾는 날이 다가오면 우리민족은 곧 바로 민족의 대이동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것도 수천만이 불과 3~4일 만에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가히 장관(壯觀)이라 할 만하다. 우리 민족만큼 조상을 받드는 민족도 드므리라는 생각이 든다. 조상을 잘 받들고 모셔야함은 당연하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데 모이는 추석과 같은 명절을 맞으면 어느 가정에서나 으레 집안 대소사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게 마련이다. 사는 얘기부터 시작하다보면 자연스레 관혼상제 문제로 이야기가 좁혀진다. 드러내 놓지 않아서 그렇지 이중에서는 아마도 집안마다 장례문제가 빠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매장이냐 화장이냐’의 문제는 부지불식간에 오늘 우리들 각 가정에 주어진 선택형 숙제가 되었다. “산소라도 있어야 그나마 자손들이 찾아 올 것 아니냐”, “묘 자리 구하기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납골당을 마련하지요.” 등등.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예견되는 대화내용들이다. 우리나라만큼 묘지와 장례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논쟁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여북하면 외국인의 눈에 ‘한국하면 묘지가 떠오른다.’고 했을까.
 우리에겐 미루어야 할 문제가 있고,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될 문제들이 있다. 이번 추석을 지내면서 누구나 한번쯤 느꼈을 문제가 바로 ‘묘지난’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다. 장묘제도의 개선이야말로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우리나라의 경우 앞으로 2년 후인 2006년이면 전국 어디서나 묘지를 구할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서울은 올해 안에 포화 상태에 이르고 인천도 2년 후엔 묘지 부족으로 매장이 불가능하리라는 통계다. 우리는 지금 양택(陽宅)난에 음택(陰宅)난 까지 겪고 있는 셈이다. 특히 인천 영종지역의 경우는 공항이 들어서고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인구수는 가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지역이다. 인천시의 다른 지역보다 포화상태가 앞 당겨 찾아온 것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납골시설이 혐오시설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쉽사리 주민들에게 선득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뚝하면 신도시 건설계획을 내놓고 있는데 새로 조성되는 신도시 내에 충분한 공간의 납골시설도 함께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최근 한국토지행정학회가 실시한 장묘문화 의식조사 결과 성인10명 중 6명이 화장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유로는 좁은 국토면적을 들었다. 문제는 시민들의 이 같은 의식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일부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 있다. 이들이 사치스런 호화분묘를 선호하고 죽어서도 땅 몇 평 더 가져간다는 의식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 강토는 끊임없이 묘지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연전에 다녀온 포토맥 강변에 자리 잡은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는 병사나 장군이나 무덤의 크기에 차이가 없었다. 미국국립묘지의 가장 큰 특징은 신분이나 계급에 차등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곳에 묻히는 망자면 누구에게나 일률적으로 1.36평의 묘지 면적이 제공된다. 매장구역도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묘지 사용 순서에 따라 지정될 뿐이다. 다만 비석의 경우 정부에서 제공한 비석을 반납하고 국가에서 정한 규격 13피트를 넘지 않는 선에서 자기 부담으로 세울 수는 있다. 이렇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사병의 비석이 장성의 비석보다 높을 수가 있는 것이다. 죽어서까지 차등을 두는 ‘장군묘역’이니 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죽은 후 땅에 묻을 때 나의 손이 무덤 밖으로 나오도록 하라. 그리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게 하라.” 알렉산더대왕이 남긴 말이다. 천하를 손에 쥐었다 놓았다 하던 제왕까지도 죽을 땐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묘지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장묘문화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화장률을 높이고 납골시설을 확충하는 방법밖에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묘지로 인해 해마다 여의도 면적의 1.2배에 달하는 땅이 사라지고 있다. 머지않아 유택(幽宅)에 밀려 산 사람들과 후손들이 살 집이 없어질 판이다. 우리 조상님들도 양택이던 유택이던 간에 주택사정이 이 지경에 이르는 것까지는 바라시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