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또래와 많이 어울린다. 부모와 자식들이 한 집에서 산다고 해도 실제 부모 자식간에 다양한 화제로 얘기를 나누는 경우는 적은 편이다. 필자는 나이 탓으로 50대, 60대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는 편이고 그래서 세상 얘기를 나누다 보면 상대편은 거의가 극히 보수적인 견해를 갖고 있어 외톨이가 되는 때가 많다.
 지난 선거때는 대화 상대의 거의가 이회창 후보지지자였다. 또 대북관계 얘기가 나오면 상대는 북한 성토에 열을 올렸고 요즘에는 노조때문에 미래가 암담하다거나 심지어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어떤 사람은 “망해야 정신 차린다”면서 흥분하기도 했다.
 사실 민주주의, 좀더 구체적으로는 서양에서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대중민주주의’는 나라에 따라 사회전반에 걸쳐 쇄신과 활력을 가져왔는가 하면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기도 했다. 우리의 경우 성년이 되면 누구나 투표권을 갖는 바람에 형식적 의미에서는 1948년 정부수립이후로 대중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 의미에서 귄위주의 또는 엘리트주의가 퇴색하고 대중성이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지난 90년대부터라고 볼 수 있고 아마도 평가는 다소 이르지만 노무현 정부의 등장이 대중민주주의의 개화시기라고 볼 수 있을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이 대중시대에 대중주의가 엘리트주의보다 유익하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할 때가 된것이다.
 표면적인 현상만 보고 대중사회를 매도하면서 과거의 권위주의 시대를 찬양하는 것은 시대발전에 저해되는 행위를 하는 것이며 반대로 최근의 몇가지 사례에서 보듯 회사가 망하든 사회가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지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사회발전에 해악을 끼치는 행위일 것이다.
 한마디로 대중사회의 주역은 대중이다. 영어로 mass 또는 people이라고 쓰는 대중이 과거의 왕이나 귀족같은 상류 신분계층이나 명문집안에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보다 영향력 면에서 우세한 사회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그야말로 역사의 거대한 진보이며 문명의 찬란한 빛이며 인류 전체의 구원의 찬가인 것이다. 유사이래 소수를 제치고 다수가 주인이며 다수의 의견과 힘이 사회 전체를 주도한 시대가 지난 1백여년을 제외하고 있었던가.
 그러나 삼가하고 겸손하자. 이말은 특정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잠언이 아니다. 우리 대중에 포함된 누구나 되새겨 봄직한 말일 것이다.
 미국의 건국초기에 민주주의 기초를 세운 사람든 가운데서도 “민주주의는 자살한다”는 말로서 선거권의 대폭 확대에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다시피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재산소유정도로 선거권을 제한하면서 서민층의 정치 접근을 억제했었다. 어쨌든 이들 선진국에서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기에 이른바 ‘대중의 횡포’는 상당히 수그러들었다.
 필자는 한국인들이 고집이 세고 이기적 성향이 강하며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한다는 국내외 일부 지식인들의 비판에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러나 한국인들이 한치 앞을 못보고 그냥 날뛰는 철부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크게 봐서 보다 좋은 공동사회를 꾸려갈 자질이 대중속에 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냥 믿고 싶거나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대중은 상당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편에 속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고 시대에 대한 감각이다. 만약 노무현 행정부 5년이 파업, 폭력, 선동, 집단이기주의로 점철되다가 끝나면 한국의 정치판은 권주주의 시대로 회귀할 것이다. 또다시 소수의 정치 경제 지도자가 도덕적 무장도 없는 사이에 엘리트로서 이 땅위에 군림하고 대중적 희원이나 감성은 짓밟히는 수난을 겪게 될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이런 사회 즉 소수의 힘으로 질서 정연한 사회를 원하는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거의 절반일 정도로 많다고 본다. 겉으로 평온하고 질서정연한 권위주의 사회는 속으로 곪게 마련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껏 경험한 사실이다. 이런 미래를 원치 않는다면 대중은 대중사회의 주역으로서 책임있는 존재가 돼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