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미도 저쪽 넓은 바다에서 해면을 타고 천군만마처럼 달려 넘어오는 급한 바닷바람이 만국공원을 바라보고 기어오르면 동서일자형으로 된 높은 언덕에 부딛치게 된다. 축항을 넘어 그대로 북진하는 바람은 웃터골을 향하다가 쏜살같이 홍여문 외길 동굴 속을 힘차게 빠져 나가는 것이다’.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 소개되는 ‘반백년 향토사를 말하는 홍여문’의 서두이다. 본문에서처럼 그때는 홍예문이 맞는 표기일 텐데도 흔히들 홍여문이라 했었다. 그래서 한 독자가 홍예문이 맞는지 홍여문이 맞는지를 물어와 인천신문 지면을 통해 고일 선생이 장문의 설명을 했었다. 내용은 ‘인천석금’의 설명과 대충 같았다.
 ‘우리들은 홍여문이라고 불리워진 이것을 虹霓門(홍예문-무지개문) 또는 虹轝門(홍여문-무지개 수레문) 등 한자 이름이 있으나 하여튼 ‘무지개’처럼 된 돌문은 틀림없다. 일본인은 ‘아나몽’(穴門-혈문)이라 불렀는데 무지개라 부르는 것이 얼마나 심미적인가. 혈문은 너무나 비속하다’.
 일찍이 고일 선생이 인천의 ‘동혈승지’라고 표현했던 홍예문은 송학동과 전동을 경계하여 위치한다. 항만쪽에서 가파르게 오르다 응봉산 기슭을 넘어가는 이 근방 유일의 남북을 관통하는 고갯길에 인공 축조한 짧은 굴문이다. 홍예란 이름에서 짐작하듯 무지개꼴 즉 서양식으로는 아치형이다. 천연기념물이나 문화재가 빈약한 인천의 상징물이기에 충분하다.
 홍예문이 축조된 것은 1908년이었다. 개항 이후 인천의 시세가 급격히 확산되자 일인 거주지역을 연장하기 위해 응봉산 허리를 잘라 높이 13m 폭 7m의 화강암 석축을 쌓고 굴문을 축조했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급경사의 지형으로 난공사여서 중국인과 한인의 노무자 중 희생자가 다수 발생했다고 한다.
 유서깊은 홍예문이 마침내 인천시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강화 전등사내의 업경대 등을 포함한 10여점과 함께이다. 늦은 감이 들기는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시민의 관심 속에 주변 정리도 함께 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