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5년 전의 일이다. 그때도 21대 총선의 룰을 정하는 문제를 놓고 정치권이 한창 갑론을박을 벌였다. 특히 한국 선거정치사의 새로운 흐름이 될 것 같았던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이 과연 현실화되느냐에 온통 관심이 집중됐다. 당시 제3당인 바른미래당과 정의당이 당의 운명을 걸고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했다. 그러나 집권당인 민주당은 미지근했으며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도 반대 속에 합의 처리를 주장했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없으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이 무산될 분위기였다. 두 거대 정당의 기득권 카르텔은 당시에도 거의 철옹성에 가까웠다.
여기에 돌파구를 마련한 주인공이 당시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였다. 손 대표는 국회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 중에도 거대 양당의 담합을 규탄하며 “여의도를 지키고 있는 두 마리의 큰 곰, 수구적 양당체제를 물리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특히 당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서는 촛불혁명으로 이뤄낸 민주당 정권이 어떻게 촛불혁명으로 망한 자유한국당과 야합할 수 있느냐며 대통령의 결단을 호소하기도 했다. 결국 손 대표의 진정성이 문 대통령을 움직였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한 문 대통령의 지지 의사가 전해졌으며 민주당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이에 손 대표도 단식을 풀 수 있었다. 그렇게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은 물꼬를 텄다.
그러나 그 후의 협상은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거대 양당의 짬짜미로 인해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무늬만 남고 형체는 뜬금없는 '위성정당'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마디로 누더기가 됐다. 지금의 21대 국회는 그 반상 위에 있다. 모든 군소정당을 초토화해버리고 거대 양당만 살아남은 셈이다. 그러니 대화와 협상, 민생과 협치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 다시 22대 총선을 앞두고 선거제도 협상이 한창이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이번에도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거대 양당의 담합이 다시 물밑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지켜본 손학규 전 대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지난 4일 국회 소통관에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그가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 정치권을 향한 질타와 분노의 목소리엔 여전히 힘이 실려 있었다. 손 전 대표는 “대결의 정치가 아니라 합의의 정치, 통합의 정치로 복원하자. 그 기초를 쌓는 것이 다당제, 그 초석을 다지는 것이 연동형”이라고 강조하며 특히 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향해 지난 대선 때의 공약을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이뿐이 아니다. 최근의 '정치 실종'을 언급하며 그 책임은 대통령과 여당의 책임이 더 크다고 직격했다. 동시에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 기조도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참으로 춥고 고단한 시기에 한 시대 스승의 준엄한 죽비소리처럼 청량하고 뭉클하다.
/박상병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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