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주의가 갈수록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지적은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미국의 정치학자뿐만 아니라 주요 언론에서도 이젠 어렵지 않게 비슷한 얘기를 접할 수 있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 때가 그 절정이었다. 당시만 해도 '링컨의 공화당'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망가졌느냐는 자조가 넘쳐났다. 심지어 트럼프의 대선 패배 이후 그의 지지자들이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인 국회의사당에 난입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은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민주당 바이든 행정부로 정권이 교체된 지금은 어떨까. 미국 민주주의를 조롱한 트럼프가 내년 대통령선거를 준비하며 재기에 나섰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이미 무능과 무책임으로 각인되고 있다. 오죽했으면 트럼프의 인기가 되살아나겠느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내년 1월15일 아이오와주부터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된다. 불과 한 달 보름 남짓 남았지만 이들과 경쟁할 새로운 인물들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 많은 인재가 경쟁하던 미국정치가 어쩌다가 이처럼 초라해지고 있는 것일까. 인물도, 동력도, 경쟁력도 충격적일 만큼 빈곤하다. 사라져야 할 것이 사라지지 않고, 태어나야 할 것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위기'가 아닐까 싶다. 미국정치가 지금 딱 이런 모습이다.
이런 가운데 눈에 띄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내년 11월 미국 대선과 함께 치러질 연방 상·하원의원 선거에 불출마하겠다는 현역 의원들이 줄을 잇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난 26일자 뉴욕타임스(NYT)를 보면 지금까지 불출마를 선언한 의원은 37명(상원 7명·하원 30명)에 달한다(정계 은퇴 22명 포함). 선거 대상 지역 의원(상원 34명·하원435명)의 약 8%에 이른다. 물론 앞으로 더 많은 불출마 선언, 또는 정계 은퇴 선언이 나올 것이다. 미국 정치사에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현역 의원들의 의회 탈출, 미국 언론은 이런 현상을 미국 민주주의가 붕괴하고 있다는 경고음으로 분석하고 있다.
불출마를 선언한 의원들의 대체적인 목소리는 한마디로 정치인으로서 더는 활동할 만한 가치나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양극화된 정당체제는 날만 새면 싸우기 일쑤다. 미국의 전통인 대화와 협치는 이젠 옛 얘기가 돼버렸다는 한탄도 나온다. 대신 폭력과 대결, 비난과 음해가 대세를 장악해 버렸다. 의회는 무력하고 툭하면 행정명령을 앞세운 행정부의 나라가 돼버렸다. 야당과 그 지지자들이 기를 쓰고 반정부 투쟁에 나서는 배경이다. 극단주의와 분열주의가 미국정치를 망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정치판에 자신의 삶을 희생할 가치가 무엇이냐는 것이 이들 불출마 의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어째 정치판이 우리와 비슷한데도 우리는 오늘도 출마 러시가 줄을 잇고 있다. 어느 쪽이 좋은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박상병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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